[아침숲길] 고수입니까

권애숙 시인 2024. 1. 1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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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애숙 시인

거실 한쪽으로 방문이 열려 있고 문틀에 가로로 붉은 줄을 쳐놨군요. 그 너머 방바닥엔 커다란 접시에 먹을 것이 세 개 담겨있습니다. 어떻게든 저 줄을 넘어 방으로 들어가면 맛난 것을 취할 수 있다는 무언의 약속인 듯합니다. 그때 돌이 갓 지난 듯 보이는 남자 아이들 셋이 나타납니다. 쌍둥이 같아 보입니다. 그들은 가로막고 있는 줄을 보고 줄 너머 맛난 과자도 봅니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얻어야 한다는 것을 눈치챈 듯합니다.

첫째 아이가 망설임 없이 줄 아래로 기어들어가 쉽게 과자 한 개를 차지합니다. 둘째 아이도 줄을 슬쩍 만져보더니 앞의 아이를 따라 줄 아래로 기어들어 가 남은 과자 둘을 양손에 들고 먹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셋째 아이는 줄을 잡고 잠깐 허리를 굽히는가 싶더니 바로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려 줄을 넘어갈 시도를 계속합니다. 이미 줄 너머엔 빈 접시뿐이지만 목표가 먹는 것이 아니란 듯 열중합니다. 붙여놨던 줄 한쪽이 떨어져 아이의 옷 배꼽 부분에 와 붙습니다. 영상은 거기까지였습니다. 폰을 만지다 짧은 영상을 본 그날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세 아이들의 모습이 어른의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아 마냥 웃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단순하고 쉽게 바닥을 기어서 목표지점에 도달하기, 자신의 방법을 찾으려 잠깐 시도하지만 금방 포기하고 앞서간 이를 따라가기, 실패를 거듭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저쪽으로 가는 방법은 자기가 택한 것 말고도 더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무슨 일에든 문제는 하나이지만 답은 많습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에 따라 해결 방법이 다르지요. 목적지를 향해가는 길은 누구에겐 평탄하고 누구에겐 험하여 도중에 끊임없이 생겨나는 문제들 앞에서 후회도 할 것이며 포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게 거듭하는 실패에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답을 찾아 결국엔 자신만의 지도를 그리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거나 현명하거나 스스로 택한 여정에 격려와 응원으로 칠한 세상은 특별할 것입니다. 혼자 가는 길은 외롭지만 자유롭습니다. 스스로 길잡이가 되어 넘어지고 일어서면서 자신에게 가장 맞는 길을 만들어 갈 때 성취감이 크겠지요. 가끔 길섶에 주저앉아 바람의 온도에도 흔들리기. 구름의 무게에도 고개를 돌려 주억거리기. 돌아오거나 도중에 포기한 이들이 힘들어할 땐 그들의 뒷등을 두드려 주기. 가끔 방황하는 이들을 만나면 먼저 걸어온 길들을 가감 없이 펼쳐 보여주기. 이 모든 것들도 자신을 살찌우고 살펴보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새해 들어 “평안하세요”하고 인사를 했더니 어느 분이 “평안은 좀…”하는 뜻밖의 답을 했습니다. 예전부터 어르신은 물론 벗들에게까지 ‘두루 평안’하시란 인사말을 잘 쓰던 터라 그분의 반응에 잠깐 무안하고 의아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일을 치열하게 몰아붙이는 분이라 ‘평안’이라는 말이 ‘대충 손 놓고 편히 쉬라’는 뜻으로 들릴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같은 언어도 상황에 따라 생각에 따라 맛도 뜻도 달라지니까요. 1월이 절반을 지나고 있습니다. 시작부터 어영부영하다가 올해도 이룬 것 없이 시간의 뒷등으로 떨어질 수도 있겠다고 허둥대다 멈춥니다. 목적지에 닿기까지 서둘지 않고 평온한 마음으로 달려야 무사고가 되지 않겠는지요. 비록 조금 늦게 도착할지라도 확실하고 특별하게 채워야 할 테니까요. 무엇을 하든 ‘속도’보다 ‘방향’이 더 중요합니다. 스스로를 구속하던 코뚜레를 풀면 너른 세상의 풀밭에서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기 좋습니다.


무심한 듯, 무능한 듯, 매사 느긋하고 헐렁한 사람 중에 고수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잠을 자면서까지 보이지 않는 안테나를 세운 채 멀고 가까운 곳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닫힌 듯 열려있는 오감은 언제 어느 때든 필요하기만 하면 날아올라 구원을 기다리는 곳으로 달려가겠지요. 하지만 그들의 진면목을 보아내기 전엔 누구도 쉽게 눈치채지 못합니다. 세상은 곳곳에 숨어 있는 고수들이 살려내고 지켜냅니다. 당신은 재야의 고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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