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에 마이너스 63센트”… 한국계 감독 ‘성난 사람들’, 美 에미상 8관왕 휩쓸다
‘성난 사람들’은 15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피콕극장에서 열린 제75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미니시리즈·TV영화 부문 작품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등 8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이성진 감독은 이날 감독상 수상 무대에서 “(일을 하기 위해) 처음 로스앤젤레스에 왔을 때 돈이 없어서 통장 잔액이 마이너스 63센트였다. 그걸 갚으려고 1달러를 저금하겠다고 하니 ‘정말 1달러를 저금하는 거냐’고 묻더라”며 “그땐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고, 이런 걸(트로피를) 손에 들고 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감회를 전했다.
‘성난 사람들’의 대니 역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스티븐 연은 연기 인생에서 처음으로 에미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달 7일에도 한국계 배우 최초로 제81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성난 사람들’은 되는 일이 없는 한인 이민자 2세 대니(스티븐 연)와 성공한 사업가이지만 자신의 본모습을 잃은 채 살아가는 에이미(앨리 웡)가 난폭운전으로 엮이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블랙코미디다.
한국계 이민자 삶에 밴 현대인의 고독-분노… 세계가 공감
‘오겜’ 6관왕 이어 ‘성난 사람들’ 8관왕
설렁탕-카톡 등 한국문화 바탕… 인종초월한 보편적 내면 그려내
동양인 캐릭터, 잇단 주인공으로… 이민자들 위로 백인들엔 신선함
15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피콕 극장에서 열린 제75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상을 휩쓴 ‘성난 사람들’의 이성진 감독은 작품상 수상 무대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계 제작진과 배우가 대거 참여한 ‘성난 사람들’이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의 상으로 꼽히는 에미상에서 8관왕을 할 수 있었던 건 분노와 고독이 켜켜이 쌓여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현대인의 내면을 날카롭게 포착한 점이 인종을 막론하고 공감을 샀기 때문이라는 평가다.
‘성난 사람들’ 속 한인 2세인 대니(스티븐 연)는 집에서 게임만 하는 백수 동생 폴(영 마지노)을 건사해야 한다. 운영하던 모텔이 망해 한국으로 돌아간 부모님을 다시 미국으로 데려오려면 돈이 필요하지만 일감이 줄면서 매일 죽고 싶은 심정이다. 중국계 이민자 2세인 에이미(앨리 웡)는 성공한 식물 인테리어 사업가이지만 집에서는 본인보다 육아에 더 큰 역할을 하고 있는 남편 조지(조셉 리)의 눈치를 본다. 사사건건 비위를 맞춰야 하는 백인 재력가 친구들 앞에선 그 어디도 ‘편안한 내 공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너무 많은 부담을 짊어진 대니와 꾸며낸 표정으로 살다가 원래 모습을 잃어버린 에이미는 우연한 계기에 서로의 ‘발작 버튼’을 누르고 만다. 비뚤어진 내면의 분노가 서로를 향한 분노로 튀어버린 이들은 추악한 모습으로 서로를 파멸로 이끌고 가서야 깨닫는다. ‘아, 우리는 우리의 본모습이 어떻건 조건 없이 이해받고,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구나.’
‘성난 사람들’의 쾌거가 더욱 빛나는 이유는 시리즈 전체에 한국 문화가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가장 한국적인 코드’로 다시 한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는 평가다. 극 중 대니는 설렁탕집에서 젓가락으로 깍두기를 집어 먹고, 한인 교회에선 전 여자친구의 남편과 은근히 기 싸움을 벌인다. 잠시 한국에 가 있는 부모님은 카카오톡 영상통화로 그에게 “교회에서 좋은 한국 여자 만나서 가정을 꾸리라”고 한국말로 잔소리한다. 장면 곳곳에선 한국 기업들도 자주 언급되는데 대니는 ‘대우’ 냉장고를 보며 “한국 기업을 도와줘야 한다”고 말하는가 하면, 백색가전으로 유명한 ‘LG’의 밥솥 등을 부모님에게 선물한다. 이 감독과 스티븐 연뿐 아니라 주·조연 배우 대부분이 한국계다.
전문가들은 한국 콘텐츠가 부상한 이유 중 하나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확산을 꼽았다. OTT가 세계적으로 보편화되면서 콘텐츠 수요층이 넓어졌고, ‘다양성’이 화두로 떠올랐다는 것. 백인 위주의 창작·소비 환경에서 한국계 등 동양인은 주로 무술을 잘하는 과묵한 인물이나 소심한 너드(Nerd·괴짜) 같은 캐릭터로만 소비돼 왔다. 그러나 이들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면서 동양인 캐릭터들이 자신의 욕망과 결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 내 이민자 2, 3세들에게는 공감을, 백인들에게는 신선함을 불러일으켰다는 평가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한국, 아시아권 문화 이야기가 직접 겪은 제작진에 의해 생생하게 묘사된다는 점에서 작품성이 높아졌다”면서 “동시에 작품 속 가난한 서민들의 갈등은 보편적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다”고 평가했다.
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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