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 회고전의 불교 그림들 [김한수의 오마이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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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장욱진 회고전’을 관람했습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장욱진(1917~1990) 화백이 평생에 걸쳐 제작한 회화와 도자기 작품 등 270여점을 망라한 전시입니다.
이번 전시는 ‘가장 진지한 고백’이라는 큰 주제 아래 시기별로 4부로 구성됐습니다. 그 가운데 3부 ‘세 번째 고백:진진묘’는 장 화백과 불교의 관계를 전시하고 있더군요. 워낙 유명한 작품이 많이 나온 전시여서 장 화백의 ‘불교 그림’에 대해서는 언론에서도 주목도가 덜한 느낌이 있습니다. 저도 ‘불교 그림’이 따로 전시실을 마련해 선보이는 줄은 모르고 갔다가 작품들을 만나니 더 반가웠습니다. 오늘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장 화백의 불교 그림 이야기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3전시실은 입구에서부터 유명한 ‘진진묘(眞眞妙)’가 관람객을 맞고 있습니다. 장 화백이 아내 이순경(1920~2022) 여사를 보살로 묘사해 그린 명작이지요. ‘진진묘’는 이 여사의 법명입니다.
장 화백과 불교의 인연은 꽤 알려졌습니다. 평소 불교에 대한 관심이 많아 시간이 나면 가족과 함께 사찰 순례도 많이 다녔다고 합니다. 통도사 경봉 스님으로부터 ‘비공(非空)’이란 법명을 받았으며 생전에 스님들과의 교유도 많았고, 불사(佛事)를 하려는 스님들이 부탁하면 그림도 선뜻 시주하곤 했다고 합니다. 1980년에는 BTN불교TV 회장이자 시조시인인 성우 스님의 시에 장 화백의 목판화 14점을 담은 시화집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순경 여사는 독실한 불자로도 유명했는데, 동국대 총장을 지낸 백성욱(1897~1981) 박사 문하에서 금강경을 공부했습니다. 1977년 무렵 백 박사는 장 화백 부부에게 법당(法堂)을 세울 것을 권했다고 하지요. 장 화백은 ‘팔상도’ ‘진진묘’ 등을 시주했고 이 여사는 남편의 작품들을 금강경을 함께 공부하던 김강유 김영사 회장과 이광옥씨에게 기증했습니다. 이렇게 시주한 작품이 110여점. 김강유·이광옥씨는 40여년 간 작품들을 잘 보관하다 지난 2021년말 장욱진미술문화재단에 조건 없이 반환한 일도 있었지요.
장 화백의 유화 작품들은 크기가 작은 것으로 유명하지요. 대표작 ‘자화상’은 가로 10.8㎝, 세로 14.8㎝ 어른 손바닥만합니다. 그렇게 작은 캔버스나 종이 위에 물감을 겹쳐서 바르고 칠하고, 지우고 벗겨내고 긁어내는 과정을 반복하지요. 그렇게 버리고 버린 끝에 남긴 가느다란 선(線) 몇 가닥만으로도 꽉 찬 화면을 만들어내는 것이 장욱진이었습니다.
그런데 먹 그림은 유화와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장 화백의 장녀 장경수씨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불교 경전을 베껴쓰는 사경(寫經)을 권하면서 붓과 벼루, 먹을 선물하셨는데, 언젠가부터 아버지도 그 먹으로 그림을 그리셨다”고 합니다. 유화의 선이 꼼꼼한 계산이라면 먹 그림 속의 획과 선은 단숨에 툭툭 마음 가는 대로 그린 듯한 날 것의 느낌이 생생합니다. 불교 그림들은 먹 그림이 많습니다.
그런 먹 그림들이 이번 전시에 대거 출품됐습니다. 특히 제 눈길을 끈 것은 ‘절 나들이’(1982년작)와 ‘무제’(1979년작)였습니다. ‘절 나들이’는 위로부터 법당, 종루, 요사채, 일주문이 있고 아래엔 아치형 돌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를 일가족 세 명이 건너는 모습입니다. 솔직히 사람 숫자가 세 명인지 두 명인지 확실하지 않고, 사람들의 눈·코·입도 구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나들이’란 제목처럼 즐겁고 행복한 기운이 충분히 느껴졌습니다.
1979년작 ‘무제’는 ‘달마도’라고 이름붙여도 어색하지 않은 작품이었습니다. 정수리가 뾰족한데 시커먼 눈썹과 왕방울 같은 두 눈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작품 설명에는 장 화백이 즐겨 찾던 문경 김룡사의 석불 입상과 닮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실제로 김룡사 석불 사진을 보니 자연석을 깎아 만든 석불 머리가 삼각형으로 뾰족하더군요. 1978년작 ‘문경 김룡사’라는 작품도 있습니다. 종이에 마커펜으로 옆에서 본 김룡사 건물을 그렸는데, 몬드리안의 작품들처럼 면을 분할한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1979년작 ‘심우도(尋牛圖)’ 역시 불교적 사색의 결과입니다. 심우도는 소를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깨달음의 길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사찰 법당 외벽의 벽화로도 많이 등장합니다. 장 화백은 역시 한 화면에 극도의 생략을 통해 그 깨달음의 과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977년작 ‘사찰’은 전형적인 한국 사찰의 가람배치를 고지도(古地圖)처럼 표현한 유화작품입니다. 위에는 해, 아래에는 반달 가운데에는 정사각형 구도에 법당과 좌우 요사채, 일주문을 그려넣고 아래쪽 좌우에는 종루(鐘樓)와 천왕문을 배치했지요. 어떻게 이렇게 심플하면서도 빠짐 없이 사찰을 표현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기도하는 여인’(연도미상)은 무릎 꿇고 향을 피우며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에밀레종의 비천상(飛天像)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장 화백은 선(線) 몇 가닥만으로 이런 형상을 만들었네요.
‘彌勒尊如來佛(미륵존여래불)’이라 한자로 적고 정수리 뾰족한 불상을 구석에 그린 작품들과 8폭 병풍까지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전시는 지난해 9월에 개막해 2월 12일까지 열리고 있으니 폐막까지는 1개월이 채 안 남았네요. 여건이 되시는 분들은 관람해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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