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진행형인 4·3의 아픔, 미스터리 시각으로 풀어내다
“제주 현대사 최대 비극 쓰겠다” 다짐
도민 대부분 언급 꺼려 간접 취재 활용
책·자료 수집, 강의·토론회 쫓아다녀
4·3 당시 밀고 성행… 주요소재로 다뤄
심사위원들 “미스터리 장르 의미 확장
소설적 형상화… 선명한 차별성 증명”
“버튼을 한 번 눌러볼까.”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길을 보내고 있던 것은 제주도를 모형으로 축소한 디오라마였다. 평화공원 내 전시장에 설치된 디오라마는 버튼을 누르면 4·3사건 당시 피해를 입은 마을에 빨간불이 켜지도록 설계돼 있었다. 그는 아이들을 보면서 경쾌하게 물었다.
“내가 한국 근현대사 교육에서 제일 중요한 단추 하나를 빠뜨리고 다른 것만 알고 있었구나. 그때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아니 어떻게 고등학교 역사수업 등에서 이렇게 안 다룰 수가 있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뒤 일주일 동안 악몽을 꿨다. 작가를 꿈꿨던 그는, 2016년 2월 이후 4·3을 조금씩 공부해 나가면서 책이나 자료를 모아갔다. 강의를 찾아서 듣기도 했고, 토론회에도 쫓아갔다. 언젠가 4·3을 다룬 작품을 써야지.
소설가 박소해는 오랜 희망과 준비 끝에 4·3사건이 여전히 제주 사람들에게 깊은 상흔을 남기고 있음을 보여준 단편 ‘해녀의 아들’를 지난해 ‘계간 미스터리’ 가을호에 발표했다. 작품은 최근 한국추리작가협회가 주관하는 한국추리문학상 제17회 황금펜상에 선정됐다.
“아직도 영순이 삼춘 말이 들리는 듯했다. 그녀는 판판한 검은 돌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승주는 잠수복을 입은 작은 몸을 내려다봤다. 생명이 사라진 눈의 홍채는 탁한 회색빛을 띠었고, 보라색으로 변한 입술은 살짝 벌어져 있었다. 허망할 정도로 왜소한 몸이었다. 이 가냘픈 몸으로 평생 물질을 하며 세 아들과 남편, 시부모까지 건사했다. 어린 시절 승주에게 한없이 다정다감했던 영순이 삼춘이었다. 승주는 자신도 모르게 눈가가 붉어지면서 입술이 떨렸다.”
소설은 팔순이 넘은 해녀 영순이 삼촌이 물질 도중에 사망하는 사고로부터 시작된다. 새 사실과 정황이 하나둘 드러나면서 사고는 이내 사건으로 전환한다. 해녀의 아들 좌승주는 살인의 배경에 4·3사건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음을 깨닫고 비극의 핵심으로 들어가는데.
“승주는 말없이 그 곡소리를 들었다. 70년간 이어져 온 슬픔의 그림자는 길었다. 어떤 말로도 아버지를 위로할 수 없었다. 날카로운 봄 햇살이 눈을 찔렀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땅바닥에 떨어진 동백꽃 송이들 옆에서 승주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로 두 눈을 가만히 감았다.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서 그는 수사팀장도 형사도 아닌 단지 동네 해녀의 아들일 뿐이었다.”
소설가 박소해가 사회 미스터리의 시각으로 형상화한 4·3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갈까. 박 작가를 지난 8일 전화로 만났다.
―작품은 4·3 당시 밀고 문제를 주요 소재로 다뤘는데.
“제주도민들이 별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당시 밀고도 상당히 성행했다고 하더라. 마을 사람이나 이웃사촌, 심지어 가족도 밀고했다고 들었다. 이때 서청 단원들이 많이 제주도에 내려와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일부는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으면 접근해 자신에게 시집오면 가족들을 보호해 주겠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몇몇 여성들이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서청 단원들과 결혼했다고 들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제주에서 살다가 육지로 가기도 했다.”
―4·3 공부는 어떻게 했는가.
“도민들에게 4·3을 물으면 대부분 이야기하기를 꺼리더라. 아직도 아픔이 현재진행형이라서 그렇다. 저의 경우 직접적인 취재보다는 간증집이나 증언집 등 간접 취재를 많이 활용했던 것 같다.” 이와 관련, 그는 ‘작가의 말’에서 “2년 동안의 자료 조사, 실제 해녀 가족 인터뷰, 그리고 정방폭포 학살 사건과 생존자 및 유족의 증언을 소설에 녹였다”고 적었다.
내가 그림책 작가가 되고 싶은 게 맞는 것인가, 나는 과연 무엇을 제일 좋아했던가. 자신의 진로를 곰곰이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단 한 번도 질리지 않고 꾸준히 애정을 유지해온 것은… 바로 미스터리였다. 나의 셜록 홈스, 애거사 크리스티…. 내가 원래 소설가를 지망했잖아?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장르 쪽에서 한번 등단해보면 어떨까.
2018년, 그림책 작가의 꿈을 접고 장르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더구나 막내를 가지게 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평생 애만 키우다가 소설가도 못되고 끝날지도 모르겠구나. 열심히 소설을 썼다. 장편소설을 준비하고, 공모전도 내고, 시놉시스도 준비하고…. 삼 년 안에 등단하지 못하면 재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만두겠다는 배수의 진까지 치고.
“작가라는 제 직업 앞에 순수소설이나 장르소설 같은 레테르가 붙는 것보다 이야기를 짓는 사람, 이야기 세계 여행자로 알려지면 좋겠다. 일본의 한 판타지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한 작가가 한 장르가 돼야 한다고. 저는 그 말에 깊이 공감한다. 제 소설이 추리소설이나 공상과학(SF), 로맨스로만 읽히는 게 아니라 제 이름이 장르가 되는 그날이 오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열심히 더 노력해야 한다. 올해에는 하우스 호러 장편과 좌승주 형사 연작소설집을 낼 계획이다.”
학기 중에는 오전 6시쯤 일어나 글을 좀 쓰다가, 오전 7시 반에서 8시 사이 아이들을 깨워서 밥 먹여 학교를 보낸 뒤, 집 근처 도서관이나 카페에 가서 글을 쓴다. 오후 4시에서 5시 사이 퇴근해 어린이집에서 막내를 데려온 뒤, 저녁을 준비해 귀가한 아이들에게 먹이고, 혹시 체력이 되면 책을 읽거나 작업을 조금 더 한 뒤, 밤 10시쯤 꿈나라로. 세 아이의 엄마인 작가 박소해의 제주 일상은 아이들의 일정에 맞춰서 오늘도 톱니바퀴처럼 돌아갈 것이다.
“저는 기본적으로 잠을 규칙적으로 푹 자야 한다고 믿는 주의입니다.” 잠과 체력에 대한 철학이 인터뷰 끝자락에 붙어서 유쾌한 폭포수로 쏟아진다. “무조건 오래 앉아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꾸준히 매일 쓰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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