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낯선 사이] 비상대책위원회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은 지난해 12월21일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직을 수락하며 국민의힘에 입당, 상임전국위원회의 의결을 통해 12월26일부터 비대위원장으로서 임기를 시작했다.
한국 정치는 언제나 비상(非常)이다. 그래서 정치권에서 아무리 위기라고 해도 국민의 입장에서는 ‘비상대책위원회’가 낯설지 않고 비상사태라는 느낌도 별로 없다. ‘비대위’가 상시적으로 필요하다면, 비상 상태는 상례(常例)가 된다.
문제는 어떤 상황이 비상 상태이고, 누구에게 무슨 문제가 위기인가이다. 지금 여당의 비대위는 당 조직이 안정적으로 작동하지 않아서 만든 기구인가 아니면 단지 ‘권력자 물갈이’를 위한 형식적인 이름인가.
어쨌든 “비상사태가 상례가 된 것이다”. 내용은 완전히 다르지만, 익숙한 말 아닌가. 다음은 발터 베냐민의 마지막 저작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역사철학테제) 중 테제 8의 일부이다.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살고 있는 비상사태가 상례임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이러한 인식에 상응하는 역사의 개념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실질적 비상사태를 도래시키는 것이 우리의 과제로 떠오를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베냐민의 비상사태는 칼 슈미트의 개념과 호응한다. 카를 슈미트는 주권을 무엇이 예외 상태(비상사태)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주권자는 합법적으로 법을 중지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자이다. 즉 주권자는 합법과 불법의 기준을 정할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 존재다. 이 때문에 주권자는 법 내부에 있으면서 동시에 법 외부에 있을 수 있다.
주권자로서 국가 권력은 합법적으로 치외법권 지대에 존재한다. 주권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끔찍한 폭력도 적법하게 행사할 수 있다는 얘기다. 흔히 말하는 합법적인 폭력으로서 공권력이 대표적이다.
치외법권 영역은 두 경우가 있다. 하나는 행사하는 주체(주권자)의 그것이요, 또 하나는 주권자에 의해 추방되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피억압자이다. 즉 주권자는 합법적 신분으로, 피억압 대중은 불법적 신분으로 치외법권 지대에 있는 것이다. 전자가 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치외법권 영역에 있다면, 후자는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법의 바깥에 있다.
이처럼 치외법권이나 비상사태 모두 객관적인 개념이 아니다. 권력이 어떤 상태가 비상인지를 정한다. 그러므로 비상사태는 당파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다. 누군가에게 상례가 누군가엔 비상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국민의힘은 ‘국민의 힘’답게 자당의 비상대책위원회가 누구를 위한 비상 기구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대책을 세울 것인가를 밝혀야 한다. 지금 서민들은 “모든 게 비싸고, 사는 게 전쟁이다”. 일상이 비상사태이다. 가자지구의 전쟁 난민들, 이태원 참사 피해 가족들, 언제든지 임의적 법망에 걸려 범법자가 될 수 있는 이주노동자는 말할 것도 없다.
애경 가습기살균제 사건 피해자의 말은 일상과 비상을 둘러싼 개념의 대비, 삶의 대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지난해 10월 공판 최후 변론에서 가해 기업 관계자들이 미리 짜기라도 한 듯 말했어요. 그동안 재판받는 과정이 자신들한테 ‘너무 가혹했다’면서 ‘이제는 평온한 일상을 되찾고 싶다’고요. 그 말을 듣고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한 탓에 종신형을 받은 듯 평생 폐질환을 겪어야 할 우리 딸과 아들이 생각났어요”(경향신문 2023년 1월10일자). 피해자는 평생 고통받는데 가해자는 일상을 되찾고 싶단다.
국민이 알아야 권리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 체제에서 비상의 의미는 무엇인가. 총선을 앞두고 국민의힘에 무엇이 그토록 비상이고, 정치 신인 한동훈은 왜 위원장이 되었을까. 현 정권의 아킬레스건이 김건희 여사 관련 사안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번 정권 탄생 이후 모든 정치적 논란은 김 여사 문제로 수렴된다.
그들이 왜 그토록 김 여사를 보호하려 하는지 모르겠지만, 김건희 리스크를 통제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려다 보니 느닷없이 김기현 당 대표를 몰아내고 ‘대통령 라인’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이 비대위원장이 되었다. 지금 한 전 장관을 두고 ‘차기’ 운운하는 것은 난센스이다. 상황은 변하기 마련, 단지 대통령 부부가 그들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최적임자를 선택한 것뿐이다.
국민의 ‘알권리’ 운운하며 재능 있는 배우를 세 차례 포토라인에 세운 한국 사회의 매체와 사법 시스템은, 김건희 여사의 혐의와 관련한 ‘알아야 할 권리’에 대해서는 함구하거나 오해하고 있다. 고 이선균 배우의 죽음은 인권 침해의 결과다. 인권 침해를 ‘연예계 스캔들’로 만들고, 국민이 알아야 할 권리는 국민과 야당이 “시비를 걸고 있다”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엔 이것이 실질적 비상사태의 대표적 예다. 예외 상태를 임의적으로 적용한 주권자는 결국 ‘죽음’을 만들어냈다.
정당으로서 국민의힘, 정권으로서 윤석열 정부 모두 원래 ‘정상’이 아니었다. 당원의 의사로 선출된 이준석 전 당 대표를 토사구팽시키더니, ‘윤핵관’들도 대통령 부부의 의중에 따라 쫓아냈다. 지겹도록 윤핵관의 핵심으로 지목되던 장제원 의원이 대표적이다. 기이하게도 그리고 불필요하게도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긴 사건은 역사에 남을 만하다. 서울의 용산, 삼각지, 이태원 일대의 교통 혼잡은 상시적이다. 택시기사들이 늘 기피하는 구간이다. 경찰 인력 배치 기준은 늘 ‘용산’이 중심이 된다. 나는 이러한 상황이 이태원 참사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광주 사태’ 같은 직접적인 학살만이 통치권자에 의한 국민의 죽음이 아니다.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회의 본질은 자신들만의 치외법권을 위한 것이다. 현 정권은 태생적 김건희 리스크를 안고 출발했다. 한반도 통일 문제부터 반려견 사랑까지 관심사가 넓었던 김건희 여사는 현재 한 달 가까이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사이 각종 포털 사이트는 대중 문화예술인 관련 뉴스로 도배됐다. 우연이 아니다. 새로운 버전의 3S 정책이다.
한동훈, 부끄러운 줄 알아야
김 여사 관련 사안은 남성 문화의 절정인 검찰 문제다. 김 여사 가족의 범죄나 명품백이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김 여사와 대통령의 만남은 사법부, 검찰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김건희 리스크라는 말이 단 하루도 빠짐없이 들리는 이유다. 정권의 입장에서 이것은 (국민이 비판하므로) 비상사태이자 (그들이 원래 해왔던 일이므로) 상례다. 이번 정권은 애초부터 비상 상태에서 출발했다. 대통령 부부 성혼(成婚)의 구조적(?) 성격 자체가 리스크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내게 현 정권을 비판하려면 윤석열 대통령을 비판해야지 왜 ‘여성’인 배우자를 문제 삼느냐고 한다. 당대 페미니즘의 ‘대중화’ 현상 때문인지, 여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성역으로 알고 남성과 여성 모두가 ‘예민한’ 분위기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다. 페미니즘의 전제는 “여성은 모두 같다”가 아니라 “여성들 간에는 차이가 있다”이다. 여성은 본디 개별적 존재인데, 가부장제가 여성을 동질적인 그룹으로 집단화한 것이다. 여성들 간에는 인종, 계급, 나이 등 수많은 차이가 있으며, 각자 다양한 삶을 산다. 김 여사 비판은 미소지니(여성혐오)가 아니다.
김건희 리스크에 대해 국민의힘은 비상대책위로 대응하고, 야당과 국민은 ‘김건희 특별검사제’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특검 역시 일종의 비상사태다. 특검은 상례적인 범죄가 아닐 경우, 독립적인 검찰만이 가지고 있는 기소독점주의의 예외다. 특검도 비대위만큼이나 한국 정치에서 많이 등장하는 단어다.
현 정권의 비상사태 내용은 그들만의 비상이다. 그들이 진정 국민의 대표라면, 국민들의 일상적 비상사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지금 비상대책위는 ‘공정과 상식’에 어긋나는 비상사태다. 자신들의 죄를 덮기 위해, 국민 요구를 무시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 비상대책위라면, 이것은 국민을 상대로 한 ‘계엄’에 다름없다.
앞서 말한 대로 비상사태의 개념은 당파적인 의미로 피아(彼我)에게 그 뜻이 다르다. 정권의 비상 상태와 국민의 비상 상태는 다르다. 특히 대통령 부부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는 매우 문제적이다. 대통령 배우자 문제를 치외법권으로 만들려는 기구가 왜 집권 정당을 대표하는가. 지금 여당의 비대위는 “개혁”을 내세우며 실제로는 대통령 부부의 뒤처리를 하는 도구이다.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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