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적대 국가’ 규정한 김정은, 김일성·김정일 남북관계 유산까지 폐기

박은경 기자 2024. 1. 16.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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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헌법에 대한민국을 ‘제1적대국’으로 명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등 대남 위협 수위를 다시 한번 끌어올리고 윤석열 대통령도 이에 대해 경고를 이어가며 남북 관계가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16일 경기도 파주 오두산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황해북도 개풍군 마을 일대가 고요하다. 조태형 기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북을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고 대남전략을 바꾸는 과정에서 선대 유산까지 부정하고 나섰다. 유훈정치로 세습을 정당화해 온 북한에서는 매우 이례적 행보다.

16일 조선중앙통신 보도에 따르면 전날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0차 회의에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민족경제협력국, 금강산국제관광국을 폐지하기로 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지난해 말 전원회의에서 “당 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를 비롯한 대남사업 부문의 기구들을 정리·개편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한 흐름과 일맥상통한다. 국가기구가 아닌 당 기구인 통일전선부는 조만간 열릴 것으로 보이는 당 중앙위 정치국회의에서 폐지를 밝힐 것으로 보인다.

앞서 6·15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측본부, 민족화해협의회, 단군민족통일협의회 등이 폐지됐고 평양방송을 비롯한 대남·대외 선전매체들도 운영이 중단된 상태다. 북한이 남북관계를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규정하면서 통일을 위한 각종 조직·기구 정리에 나선 것이다.

김 위원장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 명기된 ‘조국통일 3대 원칙’인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표현도 헌법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7·4 남북공동성명은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당국이 합의한 통일원칙으로 한반도 정세가 얼어붙었을 때도 북한은 이를 기본원칙으로 지켜왔다.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삭제함으로써 그간 모든 남북합의서를 무효화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연설에서 “수도 평양의 남쪽 관문에 꼴불견으로 서 있는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을 철거해버리는 등의 대책”도 실행하라고 지시했다. 조국통일 3대 헌장은 평화·통일·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 원칙,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고려민주연방제 통일방안 등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통일원칙이다. 이 탑도 김일성 주석의 ‘통일유훈’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1년 준공됐다. 평양-개성간 고속도로 양쪽에서 남북 여성이 각각 한반도 지도를 높이 쳐들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6.15 남북공동선언’을 상징해 가로 길이를 61.5m로 맞췄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헌법에 대한민국을 ‘제1적대국’으로 명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등 대남 위협 수위를 다시 한번 끌어올리고 윤석열 대통령도 이에 대해 경고를 이어가며 남북 관계가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16일 경기도 파주 오두산통일전망대에서 철조망 너머로 북한 개풍군 마을 일대가 보이고 있다. 조태형 기자

김 위원장은 “북남교류협력의 상징으로 존재하던 경의선의 우리측 구간을 회복불가한 수준으로 물리적으로 완전히 끊어 놓는 것을 비롯해 접경지역의 모든 북남련계 조건들을 철저히 분리시키기 위한 단계별 조치들을 엄격히 실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의선을 비롯해 접경지역의 남북간 연결사업과 금강산관광사업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김 위원장이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고 통일을 삭제하면서 할아버지인 김일성, 아버지인 김정일의 유산도 부정하게 된 것이다.

북한이 선대에서 쌓아왔던 대남 기조나 통일 원칙을 바꾸고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 등 선대 업적으로 홍보해온 것을 해체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선대 유훈 폐기로 7·4 남북공동성명을 기반으로 형성됐던 남북관계도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됐다.

박은경 기자 yam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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