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눈으로 본 사회의 부조리… ‘노 베어스,’ ‘나의 올드 오크’ [엄형준의 씬세계]

엄형준 2024. 1. 16.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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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파르 파나히, 세계적 명성과 달리 자국에선 출금·영화제작 금지
자신과 영화, 영화 안 영화 통해 ‘있지도 않은 곰’ 믿는 현실 개탄
켄 로치 ‘나의 올드 오크’ 통해 노동과 빈곤에 대한 철학 드러내
직장 잃은 노동자, 자기보다 더 더약자인 이민자 괴롭히는 모순 고발

허름한 집 문 뒤에서 카메라로 뭔가를 찍고 있는 남자. 영화 포스터 위쪽에는 ‘뉴욕타임스 선정 최고의 영화’라는 문구와 함께 별 다섯 개가 그려져 있다. 포스터만 보면 예술영화처럼 생각되고 재미라고는 없어 보이는 ‘노 베어스’는, 그냥 보면 평범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 배경을 알고 보면 만듦새에 감탄하게 된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의 올드 오크’는 영국 북동부의 폐광촌을 배경으로 시리아 난민인 소녀 ‘야라’와 펍 운영자 ‘티제이(TJ)’의 우정을 통해 ‘연대의 힘’을 보여준다.
자파르 파나히는 이란을 대표하는 거장 감독이자 각본가다. 장편 데뷔작인 ‘하얀풍선’(1995)으로 제48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받았고, ‘써클’(2000)로 베니스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또 ‘오프사이드’(2006)와 ‘닫힌 커튼’(2013)으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과 ‘택시’(2015)로는 최고상인 황금곰상을 수상하고, ‘3개의 얼굴들’(2018)로 칸 영화제 각본상을 받는 등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한다.

그런 그는 정작 모국인 이란에선 출국과 영화 촬영을 금지당하는 수모를 겪고 있다. 이슬람 민병대의 총에 맞고 사망하며 민주화의 상징이 된 네다 솔탄의 추모식에 참석하고, 국가에 반대하고 안보에 위협이 되는 선전을 했다는 이유에서다.

지난 10일 개봉한 ‘노 베어스’엔 파나히 감독이 ‘자신’으로 출연, 국경 마을에 머물며 원격으로 튀르키예에서 영화를 찍으며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다.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실제 영화 촬영을 하거나 출국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작품 속에 투영해, 영화 안에서 영화를 찍는 동시에 그 모습을 하나의 영화로 만든 셈이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영화 ‘노 베어스’에 자신의 실제 처지와 마찬가지로 국경마을에서 원격으로 영화를 찍는 감독으로 직접 출연한다. 시골 마을 사람들은 순박해 보이지만, 감독을 이방인 취급하고, 전통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진짜 파나히 감독이 처한 현실과, 영화 속 현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찍은 영화 안의 현실 등 세 가지 세상을 통해 이란이 처한 상황을 꼬집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 이해하고 스크린을 마주하면 영화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

영화에서 국경 마을 사람들은 ‘좋은 차’를 타고 가난한 시골에 내려온 감독을 겉으론 호의적으로 대하지만 속으론 의심하고 가까이하길 꺼린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는데, 그러다가 젊은 남녀가 함께 있는 모습을 촬영했다는 의심을 산다. 마을엔 여자가 태어날 때부터 결혼 상대를 짝지어주는 풍습이 있는데, 여자가 짝이 아닌 남자와 어울렸다는 소문이 퍼지며 난리가 나고, 마을 사람들은 이들의 부정을 증명하기 위해 감독에게 찍은 사진을 내놓을 것을 요구한다.

이 혼란 속에 파나히 감독은 중동을 탈출해 유럽으로 떠나려는 부부의 다큐멘터리를 원격으로 촬영 중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탈출은 쉽지 않고,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는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영화 ‘노 베어스’에 자신의 실제 처지와 마찬가지로 국경마을에서 원격으로 영화를 찍는 감독으로 직접 출연한다. 시골 마을 사람들은 순박해 보이지만, 감독을 이방인 취급하고, 전통에 사로잡혀 있다.
영화의 제목인 ‘노 베어스’는 이란의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 같은 단어다. 한 마을 사람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진실의 방’으로 향하는 파나히 감독을 붙잡고 “그쪽으로 가면 곰이 나온다”고 경고한다. 하지만 자신이 할 얘기를 다 하고 나선 “곰은 없으며, 마을 사람들을 겁주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털어놓는다. 이란 정부가 있지도 않은 곰으로 국민을 두렵게 하고, 국민은 그 곰을 믿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유다. 감독은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이란이 처한 현실이 얼마나 무거운가를 만방에 알린다.
‘노 베어스’가 안에서 바라본 중동의 현실이라면, 17일 개봉하는 켄 로치 감독의 ‘나의 올드 오크’는 서방세계의 중동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며, 궁지에 몰린 노동자 계급의 부조리한 행동을 꼬집는다.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15번 초청돼, 두 번의 황금종려상과 3번의 심사위원상을 받은 로치 감독은 노동과 빈곤 문제에 큰 관심을 보여 왔다. ‘나의 올드 오크’ 역시 그가 그려온 세계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단순하고, 화려한 기교나 놀라움은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하는 건 영상미보다는 감독이 관객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아무도 찾지 않는 영국 북동부의 폐광촌에 어느 날 시리아 난민을 태운 버스가 들어온다. 주민들은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외치고 욕하며 이들을 믿을 수 없는 이방인 취급한다. 그때 ‘올드 오크’ 펍을 운영 중인 티제이(TJ)는 버스에 타고 있던 사진작가가 꿈인, 소녀 ‘야라’를 만난다. 한때 광산노동자로 노조운동과 사람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던 TJ는 이젠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상황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시리아 난민을 돕지만, 사라진 일자리와 집값 폭락 등 자신들이 처한 신세를 한탄하며 외부인을 미워하는 몇 남지 않은 단골손님도 지켜야 하는 처지다.

영화는 힘센 자본가에겐 저항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난민을 괴롭히고 내쫓으려 하는, 즉 약자가 약자를 공격하는 행태를 꼬집는다. 로치 감독은 여전히 행동하는 양심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 약자들의 연대가 강한 힘을 만든다는 굳은 신념을 드러낸다. 87세의 노장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미안해요, 리키’와 함께 그의 “인생 마지막 장편영화”라는 이 작품을 통해 영국 사회의 뿌리 깊은 빈곤과 차별 문제에 관한 자신의 철학을 정리한다.

엄형준 선임기자 ti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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