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풀기 정책은 ‘유령 만들기’와 같다[시평]

2024. 1. 16.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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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용 전남대 명예교수·경제학
미국 금융위기와 코로나 위기
주요국 돈 엄청 풀어 고통 가중
금리 올리자 경제 정상화 진입
한국도 온갖 명분으로 돈 풀어
정부 저축도 없어 더 큰 부작용
돈 풀기는 모든 경제위기 근원

미국경제학회(AEA) 총회는 매년 1월 초에 전 세계의 경제학자들이 모여 지식을 교류하는 큰 마당이다. 지난 5∼7일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서 열린 올해 총회에서는 일부 학자가 기존의 경제 모형에 대한 오류를 시인한 점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금리 인상에 따른 경기 침체를 겪지 않고서는 물가를 잡을 수 없다는 예측이 틀렸다는 자성의 목소리를 낸 것이다.

미래는 불확실하므로 빗나간 예측에 대해 비난할 생각은 없다. 문제는, 새로운 데이터를 고려해 모형을 수정한다고 해도 다음에 또 똑같은 오류를 범할 것이라는 데 있다. 다수의 경제학자가 동의하는 현재의 패러다임은 일련의 경제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으로서 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세계 주요국은 장기간의 저금리 정책으로 돈을 풀어 야기한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를 넘기 위해 다시 돈을 풀었고, 2019년의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계기로 엄청난 양의 돈을 풀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현재의 자원에 대해 미래의 자원을 할인하는 주관적) 이자율은 현재의 소비와 미래의 저축을 결정하고, 생산자는 이를 좇아 생산활동을 한다. 이제 소비자들의 소비/저축 비율은 변하지 않았는데 중앙은행이 장기간 금리를 낮추고 돈을 풀면, 예를 들어 소비자들은 변함없이 ‘소비 7, 저축 3’을 고수하고 있는데, 생산자들은 ‘소비 5, 저축 5’로 생각해 소비재 생산을 줄이고 잘못된 투자를 늘린다. 장기간에 걸쳐 늘어난 돈을 사람들의 저축이 증가한 것으로 오인하고, 미래에 늘어날 소비에 대응하기 위해 투자를 늘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 7을 소비하려는 소비구조와 5를 생산하는 공급구조가 이탈해 소비재 생산이 줄고 물가는 오른다. 잘못된 투자는 유휴자원이 아니라 폐기된다. 이후 물가 상승을 우려해 금리를 올리고 돈 풀기를 멈추면 이탈됐던 소비구조와 공급구조가 다시 맞춰지고 경제가 정상 궤도에 들어선다.

미국이 높은 물가 상승을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고 돈 풀기를 줄이자 경제가 회복 국면에 들어서는 것은 바로 이런 사정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정할 기존 모형이 위 이론에 기초한 것으로 바뀌지 않는 한 똑같은 오류는 반복될 것이다. 이는 1985년부터 저금리를 고집하는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세월이 말해준다. 다른 요인들은 일본 경제의 고질병이 아니다.

한국도 같은 기간에 경기 부양, 자영업자 및 사회적 약자 지원 등의 이유로 많은 돈을 풀었다. 물론 곳간에 쌓아둔 정부 저축으로 이런 일을 한다면 소기의 목적을 상당한 정도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곳간이 비어 결국 돈을 풀었으니 목적 달성은커녕 경제질서만 어지럽히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이다.

돈이 많이 풀렸으니 물가가 오르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오르는 물가를 규제나 단속으로 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정부는 물가 상승의 원인을 기업들의 탐욕이나 기만행위 탓으로 돌리면서 ‘고통 분담’이란 이름 아래 제품 가격 인상을 억제한다.

자영업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23년 1분기 말 자영업자 대출 잔액은 1033조7000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7.6% 증가했다. 2019년 말의 684조9000억 원에서 50.9% 늘어난 규모다. 시장 조정에 맡겨야 할 자영업자 개편을 돈 풀어 구제하려는 정책으로, 결국 경제의 소비구조와 공급구조의 이탈을 지속시켜 회생은커녕 빚만 크게 늘렸다.

돈(화폐)은 교환의 매개물일 뿐, 생산재도 아니고 소비재도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돈을 많이 풀면 풀수록 경제가 더 좋아져야 하는데, 결과는 정반대이지 않은가? 그래서 돈을 풀어 경제를 살린다는 이론은, 풀지 않았으면 존재하지 않을 유령을 만들고, 다시 돈을 풀어 유령과 싸우게 하는 어리석은 이론이다.

내로라하는 많은 학자가 틀린 이론을 고수하며 철옹성을 쌓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공황을 비롯한 크고 작은 경제위기는 모두 돈 풀기로부터 시작됐다. 그런 점에서 기존 이론은 이제 충분히 반증(falsification)이 됐다. 지금의 문제는, 지식의 진위(眞僞)를 놓고 다투는 논쟁마저 없다는 것이다. 꽤 긴 시간 지식의 변화나 확대를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김영용 전남대 명예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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