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조롱·배제의 수단이 된 권력자의 언어

이재명 기자 2024. 1. 16.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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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2024년 신년사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이재명 | 기획부국장

 ‘정치는 언어고, 언어는 설득의 도구’라고 한다. 명확하고 간결해 설명문 같았던 김대중의 언어에서는 그의 지적인 치열함과 사람됨이 묻어났다. 비전과 목표, 열정이 돋보였던 노무현의 연설은 그의 진정성을 공명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들은 더러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했지만,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했다. 어떤 경우든 고개가 끄덕여지는 때가 있었다.

변한 건 언어일까 정치일까. 갈수록 정치인의 어휘는 가난해졌다. 진솔함을 느끼거나 감동을 얻기는 더더욱 어렵다. 정치인은 자신이 원하는 말만 했고 그마저도 공동체의 미래나 희망에 대한 메시지가 아닌 선동, 비방, 증오로 채워졌다. 정치는 폭력적 언어의 전장으로 변질됐다. 한때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거나 매달렸던 이들도 한숨을 내쉬거나 외면하는 일이 잦아졌다.

국민 통합의 책임이 있는 대통령은 새해 벽두부터 “이념에 기반을 둔 패거리 카르텔을 타파하겠다”고 했다. 야당과 전 정부를 겨눠 줄곧 “반국가 세력, 공산전체주의”라고도 했으니 타파의 대상이 누구인지 알 만하다. 하루 뒤 제1야당의 대표가 ‘정치 테러’를 당했다. 가해자는 경찰에 “좌파 세력에 나라가 넘어가는 것을 막고, 좌경화된 세력이 국회까지 장악하는 것을 저지하려 범죄를 저질렀다”고 했단다. 장기간 치밀하게 준비해온 범행임이 드러났다. 정확한 범행 이유 등은 아직 미궁이지만, 정치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살인을 도모한 초유의 사건 배경에 증오·혐오 정치가 있다는 사실만은 명확하다.

진화생물학자들은 인간의 잔인성과 친절함을 동전의 양면으로 본다. 다윈은 “자상한 구성원이 가장 많은 공동체가 번성하며 가장 많은 후손을 남겼다”고 분석했다. 친화력이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다는 걸 깨닫자 호모사피엔스는 다정해졌다. 반면 새로운 형태의 공격성이 생겨났다. 자신이 아끼는 집단이 다른 무리에게 위협받는다고 느끼면, 그들을 주변화하거나 악마화하고 무자비한 폭력성을 드러낸 것이다.(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이런 경향은 정치 성향을 가리지 않고 나타났다. 연민과 공감이 사라진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는 역사가 증명한 슬픈 진실이기도 하다.

특히 권력자가 편가르기와 배제의 언어를 사용하면 불행은 더 커진다. 윤석열 대통령에겐 야당을 파트너로 배려하는 존중의 언어는 물론 약자에 대한 연민의 언어를 찾아볼 수 없다. 윤 대통령이 반복해 강조하는 ‘자유’의 실체는 내 편의 자유, 시장의 자유, 반공의 자유, 강대국의 자유다.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국가라는 ‘보이는 손’을 배척하고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진 세상에서 중산층은 착즙됐고 노동자는 빈곤해졌다. 윤 대통령의 언어엔 불평등을 키운 신자유주의의 숙취가 진하게 남아 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2023년 12월2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취임 연설을 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인 한동훈의 언어는 어떨까? 법무부 장관 시절 그는 메시지보다 메신저를 공격하는 ‘조롱 화법’으로 지지자들의 우상이 됐다. 반면 그에게 질문을 던졌던 이들은 모욕감을 느꼈다. 그러던 그가 정치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동료 시민’ ‘공공선’ ‘공동체’라는 단어를 부쩍 자주 언급한다. 모두 공화주의 정치사상의 핵심 개념어다. 그가 추구하는 정치 지향인지, 세련된 이미지를 내세우려는 전략에 불과한지는 알 길이 없다.(불친절도 이 정부의 특징이다.)

하지만 한 위원장이 취임 일성으로 밝힌 “운동권 청산”과 공화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그의 언어는 배타적이고 자기분열적이다. 공화주의는 ‘동료 시민’의 자율성과 권리를 존중하고, 그 바탕에서 이견과 갈등을 조정하는 시스템이다. 생각과 가치관이 다르다고 해서 ‘동료 시민’을 청산 대상으로 삼는 공화주의는 언어도단이다. 그의 언행에서는 공화주의가 요구하는 시민의 덕성인 절제·관용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유죄와 무죄의 이분법이 지배하는 수사와 달리 정치는 자기 자신과 타인을 인정하는 끝없는 수련 과정이다. 그 끝에 정치인이 받는 보상은 인간의 다양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식물과 마찬가지로 정치도 바뀐 토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말라 죽는다.

사족. 다행스럽게도 학자들은 적대적 집단 사이에 발생하는 무자비한 공격성을 완화할 백신을 찾아냈다. 가장 효험 있는 처방은 ‘접촉’이었다. 접촉 빈도가 잦을수록 행동과 태도의 변화가 컸다. “가장 강력한 접촉의 형태는 진심 어린 우정이며, 우정에서 생기는 관용은 전염된다”(위 책)고 한다.

mis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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