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 같은 PF, ‘불신 지옥’으로 가는 관문인가?
금융위기는 ‘믿음의 위기’다. ‘믿음’은 ‘돈을 빌려주면 돌려받을 수 있다’는 일종의 느낌. 믿어야 돈을 빌려줄 수 있다. 많은 이가 믿지 않으면, 자금 흐름의 중단으로 금융위기라는 사회적 재앙을 터뜨리게 된다. 그야말로 ‘불신 지옥’.
최근 우려되는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위기’는 ‘부동산 개발’을 둘러싼 ‘믿음의 체계’가 해체되고 있다는 의미다.
사실 ‘부동산 개발’은 애당초 믿음이 머물기 어려운 부문이다. 개발사업의 주체이며 최종적 ‘차주(돈을 빌린 측)’는 ‘시행사’다. 시행사는 ‘대주(돈을 빌려주는 측)’들로부터 돈을 빌리고, 땅을 매입해 인허가를 받으며, 건설사(시공사)에 건축을 발주한다. 준공 이후엔 건물을 팔아(분양) 손에 넣은 돈을 건설사와 금융기관들에 수익으로 배분한다. 이 과정에는 적어도 3~5년의 긴 기간과 수백억~수천억원 규모의 ‘빌린 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시행사는 대다수가 개발 관련 ‘노하우’만 가진 개발 전문업체나 재건축조합 등이다. 돈이 없다. 대주의 믿음은 차주가 부자일 때 돈독해진다. 그래야 사업이 실패해도, 빌려준 돈을 차주로부터 받아낼 수 있다. 돈 없는 차주는 믿음을 얻을 수 없다. 뭘 믿고 빌려줘?
마술치곤 시시한 PF
이토록 믿음 없는 공간에 PF라는 대단한(?) 금융 기법이 믿음을 가져왔다고들 한다. 사실 PF의 당초 의미엔 ‘대단한’ 측면이 있다. 설사 차주의 신용이 부족해도(=돈이 없어도) 프로젝트의 사업성 하나만 뛰어나면 대출이 이뤄지게 만드는 금융 기법이란 것이다. PF는, 당신이 가난해도 엄청난 사업 아이디어만 있다면 큰돈을 빌릴 수 있게 해주는 마술이다.
그러나 이론과 현실은 따로 논다. ‘한국형 PF’는 크게 ‘대출’과 ‘유동화’ 형태로 이루어진다. 우선 ‘PF 대출’에서는 금융기관들(은행·보험사·증권사·저축은행·여신전문금융회사 등)이 시행사에 돈을 빌려준다. 다만 해당 사업의 시공사(건설사)를 보증인으로 세운다. 시행사가 돈을 못 갚으면 건설사가 대신 상환한다. 이를 ‘신용 보강’이라 부른다. 마술치곤 좀 시시하다.
그다음으로 유동화. 시행사들이 5년 동안 자금 1000억원이 필요하다고 치자. 이 정도 거금을 통째 5년 만기로 빌려줄 ‘대주’를 구하긴 힘들다. 그래서 시행사는 ‘3개월 뒤에 1억1000만원을 준다’는 조건의 채권을 1매당 1억원(채권 가격)으로 발행한다. 이 채권을 투자자들에게 1000장 팔면 1000억원이 조달된다. 그러나 시행사는 프로젝트 기간인 5년이 아니라 불과 3개월 뒤에 1100억원을 갚아야 한다. 방법이 있다. 다시 1100억원 상당의 채권을 발행·판매한 돈으로 상환하면 된다.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다시 빌리는 이 작업을 ‘차환’이라고 부른다.
시행사(시행사의 페이퍼 법인)는 차환을 3개월 단위로 5년(60개월) 동안 20차례 반복한다. ‘5년 뒤 상환’이란 장기 계약을 ‘만기 3개월 채권’이라는 단기 계약의 반복으로 바꿨다. 이에 사용되는 채권을 유동화증권이라고 부른다. 전문적 용어로는 PF-ABCP(자산담보부기업어음)가 있다.
그러나 차환이 계속 순조롭게 이뤄진다는 보장은 없다. 투자자들이 유동화증권 매입을 꺼릴 수 있다. 차환이 되지 않으면 해당 사업에 부도가 난다. 그래서 차환에 보증이 붙는다. 차환이 어려우면 증권사가 유동화증권을 매입해줘야 한다.
PF는 마술이 아니다. 건설사와 증권사를 보증인으로 작동하는 ‘믿음의 체계’다. 이 체계는 부동산 경기가 호황일 땐 잘 돌아간다. 시행사는 비싼 가격으로 건물을 팔아 ‘PF 대출’을 상환할 것이다. 차주가 든든하니 유동화증권이 잘 팔려서 차환도 순조롭게 이뤄진다. 그러나 부동산 경기가 불황으로 꺾여 시행사의 상환능력이 의심되는 그 순간, PF라는 ‘믿음 제조기’는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2022년 들어 한국의 부동산 경기는 엄청난 외부 충격을 만난다. 선진국 중앙은행들의 기준금리 인상이다. 금리 인상은 자산(부동산·주식·채권) 가치를 떨어뜨린다. 시행사의 PF 대출 상환과 유동화증권 매각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이 같은 PF 상황에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폭탄을 투척했다. 강원도는 레고랜드 사업(이 또한 부동산 개발) 관련 PF-ABCP를 보증하고 있었다. 2022년 9월 김진태 지사는 유동화증권에 대한 보증을 철회한다. 레고랜드 PF-ABCP가 종이조각으로 전락했다. 국가기관(강원도) 보증채권이 이런 꼴을 당하는 마당이니 증권사 보증 PF-ABCP 따위가 멀쩡할 리 없다. 투자자들은 모든 PF-ABCP를 기피하게 되었다. 건국 이후 최대 부동산 프로젝트라는 서울 둔촌주공 등 주요 건설사업들에서 차환이 막혔다.
차환이 중단되면, 보증인인 증권사가 해당 유동화증권들을 사들여야 한다. 큰 손실이 불가피하다. 매입하지 못하면 해당 증권사에 부도가 나고 시행사도 문을 닫아야 한다. 해당 사업장에 PF 대출을 해준 금융업체들은 보증인인 건설사에 ‘대신 갚으라’고 요구할 것이다. 건설사들이 보증 의무를 지키지 못하면 금융기관들이 피해를 본다. 금융기관들이 이런 지경에 빠지면 국가경제 전반이 위태로워진다.
레고랜드 사태(‘김진태 사태’로도 불린다) 직후인 2022년 10월, 정부가 개입해야 했던 이유다. 민관 합동으로 만든 ‘채권시장안정펀드(은행·증권사·보험사 등이 갹출해 조성)’로 유동화증권을 매입해 사업장들의 차환을 성립시켰다. 둔촌주공 사업은 만기를 하루 앞두고 부도를 면했다. 또한 공공의 이름을 걸고 PF 대출을 한 번 더 보증해 대주(금융기관)들을 안심켰다. 대주단협의체를 만들어 ‘우려 사업장’에 대한 만기 연장과 추가 대출을 ‘지도’하기도 했다. 이런 ‘시장안정화 조치’로, 국가는 부동산 개발 시장에 PF와 조금 다른 성격의 믿음을 다시 부여할 수 있었다. 2022년 말의 PF 위기는 (잠시나마) 진압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국가까지 가세한 이 새로운 ‘믿음의 체계’도 지속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무엇보다 미분양 주택의 수가 여전히 너무 많다. 주택이 팔리지 않는 만큼 시행사의 상환능력이 축소된다. 국토교통부 통계에 따르면, 2023년 9월 기준 전국의 미분양 주택 수는 5만9800여 가구다. 대체로 6만 가구 이상이 분양되지 않으면 위험 수준으로 본다. 2021년엔 미분양 주택이 줄곧 1만5000가구 안팎으로 유지되었다.
더 의미심장한 지표가 있다. PF 대출의 보증인인 건설사들의 우발채무가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우발채무란 ‘지금 당장’은 빚으로 인식되지 않으나 부동산 경기 악화에 따라 채무로 확정될 수 있는 금액을 의미한다. 시행사가 갚지 못하는 빚이 보증인인 건설사에 이전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기업평가가 지난해 12월12일 낸 〈2023 산업 신용 전망〉에 따르면(유효등급 받은 21개 대형 건설사 합계), 2023년 8월 말 현재 건설사 PF 우발채무 규모는 22조8000억원에 달한다. 2022년 6월 말에는 18조원이었다. 결국 2023년 12월28일엔 시공능력평가 16위인 종합건설업체 태영건설이 워크아웃을 신청한다. 만기가 돌아오는 부동산 PF 대출금들의 상환을 감당할 수 없었다.
‘질서 있는 정리’ 가능할까
가까운 시일 내에 미국 연준이 금리를 내리고 한국 내 부동산 심리가 고양되어 경기호황이 돌아올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시행사들의 상환능력은 계속 축소되고, 점점 더 많은 건설사와 금융기관들이 혼란에 빠질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금융기관들이 PF와 관련해서 어느 정도의 손실을 입을 수 있는지 검토해봐야 한다.
먼저 ‘PF 대출’ 측면부터 살펴보자. 한국은행의 ‘금융안정보고서’(2023년 12월)에 따르면, 3분기 기준 금융권(은행·증권·보험·저축은행·여신전문금융회사·상호금융)의 부동산 PF 대출 합계는 134조3000억원이다. 2020년의 92조5000억원에서 41조8000억원 늘었다. 같은 기간 연체율은 0.55%에서 2.42%로 증가했다. 다행히 은행과 보험사(각각 40조원을 웃도는 규모)의 연체율은 각각 0.0%, 1.1%로 낮다. 그러나 PF 대출 규모가 26조원인 여신전문금융회사(캐피탈 등 예금을 받지 못하지만 채권 발행 등으로 자금을 조달해서 대출하는 업체)의 연체율은 2분기의 2.2%에서 4.4%로 올랐다. 증권사 PF 대출(6조3000억원)의 연체율은 13.9%로 상당히 높다.
‘PF 유동화증권 보증’ 규모는 2023년 6월 현재 43조7000억원이다. 이 가운데 증권사가 21조7000억원 상당의 PF-ABCP를 보증하고 있다. 더욱이 2024년 1분기에 16조7000억원 규모의 만기가 돌아온다.
지난해 12월28일 태영건설 워크아웃 신청 직후 정부 측에선 지금까지 해온 시장안정화 조치(만기 연장, 차환 지원 등에 사용할 85조원 규모)를 더욱 확대하겠다고 선언했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한국은행도 공개시장운영을 통해 유동성 지원을 뒷받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중앙은행이 민간 채권을 대량 매입하는 과감한 조치도 피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결국 문제는 2024년 언제쯤 금리 인하를 계기로 부동산 경기가 안정되느냐에 달려 있다. PF 위기로 계속 확대될 불신의 공간이 정부 지원만으론 채워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부실 규모가 큰 사업장에 대해선, 한국은행이 ‘금융안정보고서‘에서 언급했듯 “질서 있는 정리”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PF가 금융시스템 전체를 ‘불신 지옥’으로 만드는 사태를 사전 차단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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