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질 효력 적지만 상징성 커… 보수·진보 소모적 정쟁 도구로 [심층기획-학생인권 조례 폐지 논란]

김유나 2024. 1. 16.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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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시·도의회 vs 교육청 갈등 고조
2010년 처음 시행 이후 학생 권익 증진
최근 교권 침해 원인 중 하나로 꼽혀
교육청, 학생 책임 강화 등 개정 착수에
서울· 충남 등 시·도의회 아예 폐지 추진
‘서이초 사건’ 후 교육부 학생지도 고시
조례 상당수 무력화… 이미 법적 효력 ↓
전문가 “큰 방향 같지만 결국 ‘이념다툼’
실질적 학생 권리 보장 방안 고민해야”
지난달 13일 서울 광화문광장.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팻말을 들고 거리에 섰다. 서울시의회에서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추진하자 이에 반대하며 1인 시위에 나선 것이다. 조 교육감은 “학생인권조례 폐지는 교육 현장을 혼란과 갈등으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학생인권조례가 10여년 전 숱한 논란 끝에 도입된 가운데 이번에는 폐지를 둘러싼 갈등이 커지고 있다. 교권 하락의 원인 중 하나로 학생인권조례가 꼽히면서 일부 시·도의회가 폐지에 나서고, 교육청은 이에 맞서면서 갈등이 빚어지는 양상이다. 실제 학생인권조례와 교권의 연관성 등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조례는 법적 효력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커 보수와 진보 진영의 소모적인 정치 싸움 소재가 됐다는 목소리가 높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지난달 1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학생인권조례 폐지에 반대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학생인권조례로 학생 인권 증진

학생인권조례는 머리·복장 자율화, 체벌 금지, 차별받지 않을 권리 등 학생의 권리를 명시한 것으로 2010년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됐다. 15일 교육부에 따르면 전국 17개 시·도 중 7곳(서울·경기·인천·충남·광주·전북·제주)에서 제정됐다. 하지만 영향력은 7곳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교육계에선 조례 존재 자체가 전국 학교에 큰 인식 변화를 불러왔다고 보고 있다. 과거 학교에서 교권만 강조되고 학생은 교사에게 복종해야 할 존재로 여겨졌지만, 조례 시행으로 학생 인권도 존중해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오히려 교사의 교권이 추락했다는 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지난해 발표한 교육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교권침해가 심각하다는 답변은 2022년 54.7%로 최근 4년 사이 가장 높았는데, 원인으로 ‘학생 인권의 지나친 강조’(42.8%)가 꼽혔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지난해 7월 교원 3만2951명을 조사한 결과 84.1%가 ‘학생인권조례가 교권 추락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기도 했다.

지난해 서울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으로 교권이 이슈가 되자 교육부는 대책을 내놓으면서 교권침해 원인 중 하나로 학생인권조례를 지목했다. 교육부는 “조례가 학생 인권만 과도하게 보호해 교권 하락에 영향을 미쳤다”며 조례에 학생의 책무성, 교사의 권리 등도 담아 개정할 것을 교육청에 요구했다.

조례가 있는 지역은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조례에 학생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개정에 착수했다. 그러나 서울과 충남 등 일부 시·도의회가 개정이 아닌 폐지안을 들고나오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조례 실질적 효력은 작아

서울시교육청 등은 조례가 없어지면 학생의 인권이 침해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여기에 대해선 반대 의견도 많다. 서울시교육청의 논리대로라면 조례 미시행 지역은 학생 인권침해가 공공연하게 이뤄져야 하지만,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애초에 조례 내용 상당수가 헌법에 이미 보장된 기본권이기도 하다. 지난달 19일 전국 교육감 9명이 학생인권조례 폐지 중단을 촉구하는 자리에서 최교진 세종시교육감은 “조례 폐지는 학생 인권 후퇴이자 민주주의의 퇴보”라고 비판했으나 세종은 조례 자체가 없는 지역이다.

이덕난 국회입법조사처 연구관(대한교육법학회 회장)은 “조례가 있는 지역과 없는 지역에 큰 차이가 있기 어렵다. 조례에 규정된 학생 권리는 헌법에 있는 내용이어서 조례가 없다고 권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며 “법 논리적인 면에서 조례의 실효성은 크지 않다”고 분석했다.
특히 지난해 9월 교육부가 교권 회복 대책으로 시행한 학생생활지도고시로 학생인권조례의 실질적인 효력은 상당수 무력화됐다. 학생생활지도고시는 교사가 할 수 있는 생활지도 내용이 담고 있는데,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 근거가 있어 조례보다 상위법 개념이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조례와 고시가 충돌할 경우 고시가 효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사가 고시를 근거로 학생에게 휴대전화 제출을 요구할 때, 학생은 조례를 근거로 들며 거부할 수 없다.

조례가 힘을 잃었음에도 교육부가 개정을 유도하는 것은 조례의 상징적 의미가 커서다. 교육부 관계자는 “조례가 없는 지역 학생도 조례를 들면서 교사 요구에 불응할 때가 있다. 실질적 효력은 없어도 학생이 반발하는 그 자체로 교사가 위축된다”며 “학생의 권리뿐만 아니라 책임도 중요하다는 식으로 개정해 인식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자유민주교육국민연합 등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지난해 9월14일 서울 종로구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학생인권조례 폐지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념 다툼’된 조례 폐지 싸움

폐지를 둘러싼 갈등도 결국 ‘이념 다툼’이란 지적이 나온다. 서울시의회는 학생인권조례 폐지안과 함께 학생과 교사 모두의 권리·책임 등을 담은 ‘학교구성원의 권리와 책임에 관한 조례안’을 발의했고, 서울시교육청은 기존 학생인권조례에 학생의 책무성을 강화한 개정안을 내놨다.

시의회의 새 조례안과 교육청의 개정안은 큰 방향에서는 유사하다. 양측이 합의가 어려운 극단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교육계 관계자는 “학생인권조례 싸움은 이름 싸움과 마찬가지다. 진보 측은 ‘학생인권’이란 이름은 그대로 두자는 것이고, 보수 측은 일단 이름을 없애자는 것”이라며 “두 조례안에서 하는 이야기는 비슷한데 정치적인 싸움을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덕난 연구관은 “‘폐지’란 말이 자극적이어서 소모적인 논란을 부추긴다. 개정은 양측이 논의테이블에 앉을 수 있지만 폐지를 다투면 비생산적인 정치적 대결이 된다”며 “폐지보다는 교육청과 시·도의회가 원하는 내용을 넣어 개정하는 방식이 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현재 조례가 실질적으로 학생의 권리를 신장하는지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관은 “그동안 조례는 관념적인 주장만 했고 학생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행·재정적 지원은 미흡했다. 학생 휴식권이 있다고 선언하는 것과 실제 휴식 공간·시간을 확보해주는 것은 다르다”며 “헌법에 있는 권리를 열거하는 식으로 조례를 유지하는 시대는 지났다. 교육감들은 조례 폐지로 싸울 때가 아니고 실질적으로 학생 권리를 보장하는 방안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세종=김유나 기자 y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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