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47] 끈질긴 과학의 승리
15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낸 가습기 살균제는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고분자인 PHMG, PGH 같은 물질을 사용한 것으로, 옥시의 살균제가 대표적이다. 다른 하나는 애경의 가습기메이트처럼 가벼운 분자인 CMIT/MIT를 사용한 제품이다. 2011년 가을, 질병관리본부에서 수행한 동물실험에서 PHMG와 PGH는 동물에게 치명적인 폐섬유화 증상을 유발했지만, CMIT/MIT 가습기 살균제는 독성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2013년에 CMIT/MIT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사망자만 5명이 나왔지만, 옥시 관계자들이 기소되어 실형을 받을 때도 CMIT/MIT 관계자들은 면제되었다. 2018년에 검찰이 애경 전 대표 등 관련 회사 임원들을 기소했을 당시에 몇몇 증거가 있었다. CMIT/MIT를 흡입한 쥐가 폐가 커지고 사망에 이르렀음을 보인 연구가 있었고, CMIT/MIT가 쥐의 폐에 염증 반응을 일으키며 천식과 흡사한 질환을 유발함을 보인 연구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실험에서 쥐의 폐에 섬유화가 진행된 경우는 없었다. 2021년 1월, 재판부는 CMIT/MIT가 쥐의 코나 기도에 염증을 일으키는 것은 맞지만 폐에 도달하거나 섬유화를 유발한다는 증거가 없고, 따라서 CMIT/MIT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의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를 입증할 수 없다고 회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피해자들은 “아픈 내 몸이 증거다”라고 외쳤지만, 이런 외침이 재판부의 판단을 흔들지는 못했다.
그런데 항소심이 진행 중이던 2022년 가을에 새로운 증거가 나왔다. 당시 경북대학교 전종호 교수와 안전성평가연구소, 국립환경과학원 연구자들은 CMIT/MIT에 방사성동위원소를 합성해서 이를 쥐의 코에 노출했는데, CMIT/MIT에 합성된 방사성동위원소가 폐, 간, 심장 등의 장기에서 발견되었다. 이 물질이 폐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뒤집힌 것이었다. 지난 11일에 있던 항소심 판결에서 재판부는 이런 새로운 과학적 증거가 사람에 대한 CMIT/MIT의 독성을 보여주는 데 충분하다는 근거하에 피고들에게 과실치사로 실형을 선고했다. 끈질긴 과학적 탐구가 재판부를 움직였고, 피해자들의 눈물을 일부나마 훔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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