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14] 스케이트 타는 목사님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2024. 1. 16.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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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레이번, 스케이트 타는 목사, 1790년대, 캔버스에 유채, 76 × 64 cm, 에든버러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소장.

한국에서 유명한 스코틀랜드인으로는 인기 위스키 브랜드를 만든 존 워커가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들에게 문화적 아이콘으로 통하는 인물은 로버트 워커. 바로 헨리 레이번(Henry Raeburn·1756~1823)의 그림 속에서 근엄하게 사제복을 갖춰 입고 어려운 스케이트 동작을 절도 있게 선보이는 목사님이다. 이 그림은 1808년 워커 사후 100년 이상 대대손손 집안 유품으로만 전해져 외부에 알려진 적이 없다가, 1949년 국가 소장품이 된 뒤, 1973년 기념우표에 등장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출신인 레이번은 귀금속 세공사였다가 초상화가로 전향해 런던 상류층까지 진출했다. 인물의 개성을 정교하게 묘사하면서 적당히 미화해 고상한 분위기를 더하고, 배경에는 명암 대비를 원숙하게 구사해 극적인 분위기를 불어넣은 레이번의 초상화는 지체 높은 주문자들의 요구를 충실히 만족시켰다. 그러나 그는 큰 성공을 노릴 수 있는 런던을 등지고 고향에 정착해 스코틀랜드 미술계를 이끌었다.

레이번과 로버트 워커는 동향 친구다. 워커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목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빙상 강국’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성장했으니, 그의 스케이트 실력은 본토에서 갈고닦은 격. 목사가 된 뒤로도 그는 에든버러 스케이팅 클럽에 가입해 겨울이면 더딩스턴 호수에서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에든버러 스케이터들은 독특하게도 스피드보다는 피겨에 주력했다. 아쉽게도 지금의 더딩스턴 호수는 스케이트를 탈 정도로 얼어붙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래도 언젠가 스케이트를 타게 된다면 워커 목사처럼 핑크색 리본으로 스케이트를 단단히 조여 매고 우아하게 링크를 돌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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