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시론] 가장 짧은 건배사 ‘한 말씀’

경기일보 2024. 1. 16.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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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전 남양주부시장

‘판장모’란 써레질한 논에 일정한 간격으로 줄을 설정하고 그 안에 모짐을 넣은 후 한 명씩 들어가 모내기를 하는 농사일을 말한다. 아주 고달픈 방식이다. 좁은 공간에서 주어진 일을 홀로 다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업무능력이 떨어지는 모내기 초보자에게는 이중고의 부담을 주는 일이다.

반면 작업속도가 느린 초보자는 못짐이 모자라면 여러 발짝 후진해 가져와야 하고 남아도는 경우에는 일일이 뒤편으로 이동시키면서 모내기 작업을 해야 한다. 그래서 판장모 이야기를 현대 행정기관의 어느 부서에서 견줘 보고자 한다.

어느 기관이나 과 단위 부서에는 과장과 4명의 팀장이 있고 각 팀에는 대략 6명씩의 팀원이 근무한다. 각 팀의 하는 일이 다른 듯 보이지만 과장으로 올라가면 모두가 ‘우리 과’의 일이다. 그러니 과장은 판장모 작업을 위해 4개의 줄을 그어 놓고 4개의 팀에 각자의 업무를 부여하고 진행을 관리하게 된다.

그러니 과장이 일 잘하는 부서만 격려하는 것은 맞지 않고 일을 못 하는 부서를 질책하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다. 과장은 4개팀 전체의 고른 운영을 통해 과 전체의 원활한 진행을 도모해야 한다. 따라서 앞서 나가는 팀은 격려하되 이보다 늦은 부서가 있으면 이 또한 지원해야 한다.

판장 모판에서 모를 심는 4명 중에 모가 모자라는 이에게는 채워주고 남아 밀리는 경우 이를 뒤편으로 이동시키는 ‘기획조정’의 역할에 과장이 나서야 할 것이다. 과장은 조율자이고 중용지도를 지키는 관리자다. 해당 부서를 책임지는 책임감 높은 부서장이기도 하다.

1980년대 공직사회에는 ‘무두일’이라는 농담이 있었다. 무두(無頭)란 ‘우두머리가 없다’는 조어(造語)인데 부서장이 출장을 가거나 개인 일로 자리를 비운 날의 오후에 ‘무두일’이 현실화한다. 이날 팀장들은 우르르 소주 한잔하러 나갔다. 6, 7급 직원들도 삼삼오오 퇴근해 석양주를 마시며 여유로운 저녁을 즐겼다.

어떤 사정으로 과장이 한두 달 공석이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처음 2주일 정도는 부서 일이 편안하게 잘 돌아간다고 했다. 하지만 한 달 이상 과장, 즉 책임자의 부재가 길어지면 몇 가지 부작용이 발생하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부서가 딱히 하는 일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부서에서 우리를 가볍게, 소홀하게 여긴다는 자격지심도 들었다.

관리자이거나 과장이라면 ‘입은 하나이고 귀가 둘인 이유’를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한다. 말이 앞서기보다는 부서원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바다. 부서장은 말하고 싶어도 참아야 한다. 회의에서 먼저 말하지 않고 기다려야 한다. 주무관이 먼저 말하고 팀장이 보충하기까지 과장은 경청하며 기다려야 한다. 과장이 회의를 주도하는 순간 실패한다. 골프와 정치에서 고개를 드는 순간 실패하는 것과 같다.

과장의 언행은 간결해야 한다. 회식에서조차 말끔해야 한다. 회식 자리에서 서무담당이 말했다. 과장님! 술 한 잔씩 모두 따랐으니 ‘한 말씀’하시지요. 과장이 잔을 높이 들고 외쳤다.

“한 말씀!”

과장의 선창 속에는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목적과 이유를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말이 포함돼 있다. 건배사를 하면서 긴 설명을 하는 것은 구성원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의 지루한 연설은 남아있던 존경심마저 삭감 당하는 원인이 된다. 리더는 과묵해야 한다. 말을 줄이고 먼저 행동하는 리더만이 참으로 어렵다는 이 시대 간부로 살아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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