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카라과 ‘민주화 운동의 상징’ 바티칸서 저항 이어간다
지난해 2월 222명을 태우고 중미 니카라과를 이륙한 비행기가 미국 워싱턴DC에 도착했다. 승객들은 니카라과를 철권 통치하는 다니엘 오르테가(78) 대통령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냈다가 ‘반(反)정부 인사’로 몰린 시민운동가·학생·언론인·기업가 등이었다. 대통령의 폭정과 인권 탄압을 문제 삼아 니카라과를 제재하던 미국 정부가 오르테가 정권을 압박, 물밑 협상을 통해 이들을 극비리에 미국으로 데려온 것이다. 당초 이 비행기에는 반독재 저항의 구심점이었던 가톨릭 사제 롤란도 알바레스(58) 주교도 탑승할 예정이었다. 앞서 그는 2022년 8월 경찰에 체포돼 구금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비행기 계단에 오르기 직전 “다른 이들이 자유를 누리게 해주세요. 나는 이 형벌을 더 견딜테니”라며 탑승을 거부했다. 그렇게 남은 알바레스 주교는 오르테가 정권의 분노를 불렀고, 반역 혐의로 징역 26년 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이어갔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니카라과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자 ‘행동하는 양심’으로 추앙받아온 알바레스 주교가 고국을 떠났다. 로이터통신은 15일 니카라과 정부가 알바레스 주교 등 구금 중이던 가톨릭 성직자 19명을 추방했고, 이들은 현재 바티칸 교황청에 머물고 있다고 보도했다. 알바레스 주교의 바티칸행은 그의 신변 이상을 우려한 교황청과 옥중 수감된 알바레스 주교의 존재를 정권의 위협으로 판단한 오르테가 정권 간 암묵적 합의에 따라 성사된 것으로 알려졌다.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실도 알바레스 주교의 석방을 촉구해왔다. 알바레스 주교는 세계 가톨릭 총본산인 바티칸에서 오르테가 정권의 폭정을 전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설 예정이다.
독재 정권을 거침없이 비판하다 반역자로 낙인찍혔던 알바레스 주교의 삶에는 중남미 최빈국이자 독재국가인 니카라과의 질곡의 현대사가 투영돼 있다. 전체 인구의 절반이 신자로 가톨릭 영향력이 큰 이 나라의 수도 마나과에서 1966년 태어난 그는 모범적인 사제 지망생으로 신학대학에서 착실하게 수업을 받는 한편, 정파 간 갈등이 극에 달했던 나라의 혼란상을 지켜봤다. 당시 니카라과는 미국의 영향력 아래 반세기 가까이 나라를 쥐락펴락해온 소모사 가문의 세습 통치에 맞서, 좌파 무장 단체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산디니스타)이 봉기하며 정정 불안이 끊이지 않았다.
산디니스타를 이끌던 게릴라 지도자 다니엘 오르테가는 1985~1990년 한 차례 집권한 뒤 경제 실정으로 민심을 잃었다. 하지만 2006년 재집권한 뒤 야권 유력 주자들을 체포하는 등 정권에 비판적인 인물들을 탄압했다. 대통령 연임 관련 조항을 뜯어고쳐 4연임에 성공, 현직 중남미 최장기 독재자가 됐다.
오르테가 정권이 반정부 시위를 유혈 진압하며 국민을 침묵시킬 때마다 니카라과 중서부 도시 마타갈파 교구를 이끌던 알바레스 주교는 공개 비판에 나섰다. 폭압에 움츠리지 않고 쓴소리를 하는 사제의 용기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오르테가는 알바레스 주교를 가톨릭 고위 사제가 아닌 가장 위험한 정적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알바레스는 베네틱토 16세 교황 시절인 2011년 주교로 임명됐다. 당시 교황은 뛰어난 인품과 학식으로 이름났던 그를 바티칸 교황청으로 데려와 요직에 기용하려고 했지만, 본인이 “조국에 남아서 할 일이 많다”며 극구 고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알바레스 주교가 ‘행동하는 양심’으로 국민의 추앙을 받으면서 다른 사제들도 목소리를 냈다. 대권 주자를 포함해 야당 유력 정치인 40여 명을 모조리 체포해 감옥에 넣고 치른 대선에서 승리한 뒤 2022년 다섯 번째 임기를 시작한 오르테가는 가톨릭계를 겨냥해 사실상 말살에 가까운 탄압을 펼치고 있다. 유엔에 따르면 오르테가 정권은 2022년부터 지금까지 1000여 곳의 시민 사회 단체를 강제 폐쇄했는데, 이 가운데 320여 곳이 가톨릭계 단체였다. 여러 곳의 가톨릭계 대학도 강제 폐쇄됐다.
사제들에 대한 무더기 체포와 추방이 되풀이됐다. 오르테가 정권은 지난해 10월에도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가톨릭 사제 12명을 국외 추방할 때 알바레스 주교를 포함시키려고 했지만, 이때도 그는 니카라과에 남겠다며 거부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그의 신변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1980년 이웃 나라 엘살바도르에서 인권 운동가로 추앙받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암살당하는 비극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우려마저 일면서 그를 일단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전직 사제이자 니카라과의 반정부 인사인 우리엘 발레호스는 “오르테가는 이 나라를 가톨릭 사제가 한 명도 없는 곳으로 만들기 원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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