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명문대, 대선 앞둔 또 하나의 전쟁터로
미국 최고 명문으로 꼽히는 하버드대의 유대인 학생 여섯 명이 최근 ‘캠퍼스에서 반유대주의(유대계 학생들을 겨냥한 혐오와 차별 행위)를 방치했다’는 이유로 하버드대를 고소했다. 소장(訴狀)에서 학생들은 “교내에서 반유대주의 시위가 허용되며, 교수들은 강의실에서 반유대주의에 반대 목소리를 낸 학생에 대한 위협을 모른 척한다”며 “하버드가 유대인들을 다른 사람들의 존중과 보호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대학 전 총장인 클로딘 게이는 지난해 10월 발발한 하마스·이스라엘 전쟁과 관련해 학내에 번지는 반유대주의 기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이후 논문 표절 논란까지 불거지며 지난 2일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 총장 사퇴에도 불구하고 학생 일부가 이사회 등 학교 측에도 책임을 묻고 나선 것이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미국 내 반유대주의를 둔 충돌이 격화하면서 대표적인 엘리트 지식인인 명문대 총장들이 전장의 최전선에서 공격받고 낙마하는 일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사회적 이슈에 휘말려, 지성의 산실로 추앙받아온 미 대학 총장들이 연쇄적으로 불명예 퇴진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동시다발적 총장 퇴진으로 인해 미 대학들의 리더십 공백 사태도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안 그래도 총장 직무에 대한 부담 등을 이유로 총장을 구하기 힘든 상황이어서 하버드대 등의 총장 선출엔 수년이 걸릴 것이란 전망이 많다.
하버드대와 함께 아이비리그(미 동북부 8개 명문 사립대)에 속한 펜실베이니아대(유펜)도 총장 대행 체제로 운영 중이다. 지난해 12월 열린 의회 청문회에서 반유대주의를 명시적으로 비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논란에 휘말렸던 엘리자베스 매길 총장이 임기 중 물러났기 때문이다. 자진 사퇴 형식이었지만 사실상 축출이었다. 당시 청문회에 함께 나왔던 샐리 콘블루스 매사추세츠공대(MIT) 총장도 반유대주의를 명확하게 비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슷한 압박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촉발한 반유대주의 논쟁이 봉합되지 않을 경우 11월 대선을 앞둔 대학가가 이념 전쟁터가 되리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와 별도로 지난해 9월엔 또다른 아이비리그인 예일대의 피터 샐러베이 총장이 “연구와 강의에 전념하겠다”며 오는 6월 사임을 예고했다. 결과적으로 명문대들이 연달아 총장 공석 사태를 맞게 된 것이다.
미 대학은 이번 논란 전에도 ‘이념 전쟁터’로 변해가는 상황이었다.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주의가 대학을 휩쓸자 이에 어긋나는 강의를 학생들이 거부하는 일이 빈번했다. 대학 교재 등에서 인종차별적 내용 등 PC주의에 맞지 않는 내용을 빼라고 요청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이런 논란이 일 때마다 명문대 총장들은 ‘미국의 정신’이라는 수정헌법 1조(표현의 자유)를 앞세워 우아하고 고상하게 대응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양한 의견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하지만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 이후 재력·영향력을 앞세운 유대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명문대 내 반유대주의 기조에 총장들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는 비난이 몰아치자 지목된 총장들이 ‘자아 비판’ 같은 사과를 하고 결국 물러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유대인 출신으로 대학 기부금을 지렛대 삼아 하버드대 게이 전 총장의 낙마를 위해 맹렬히 뛰었던 빌 애크먼 퍼싱스퀘어 캐피털 회장이 대표적인 ‘공격수’다.
이들 총장이 물러나는 데는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신임 총장 추대는 수년이 걸릴 전망이다. 총장은 학자보다는 경영인에 가까워 학문적 성과만 보고 임명할 수도 없다고 한다. 총장직은 대학 내부에서 신임을 받는 ‘샌님’ 교육자이면서 자금을 끌어오는 등 영리하게 조직을 운영하는 ‘장사꾼’ 자질을 동시에 요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총장들은 대학이라는 독특한 공유 지배구조 안에서 한마디씩 얹고 싶어하는 동문 및 정재계 지도자들과 대학 구성원 사이에서 곡예를 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탓에 일부 대학 이사회는 자금 조달이나 조직 운영 경험이 있는 학계 밖 인물을 총장으로 세우기도 한다. 예컨대 캘리포니아대에선 재닛 나폴리타노 전 국토안보부 장관이 2013~2020년 총장으로 재임했으며, 퍼듀대는 2022년까지 미치 대니얼스 전 인디애나 주지사가 총장 자리를 지켰다.
일거수일투족이 소셜미디어 등에서 감시받고 사상 검증으로 이어지는 디지털 환경도 총장들에겐 고역이다. WSJ는 “기부자 만찬이나 교수 회의에서의 실언은 온라인에서 수분 내에 (총장 경력을) 끝장나게 만든다”고 했다. 실제 대학 총장의 ‘수명’은 해마다 짧아지는 추세다. 미국교육협의회(ACE)가 5년마다 실시하는 조사에 따르면 대학 총장 평균 임기는 2006년 8.5년이었지만 2022년 5.9년으로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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