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변서 발견된 2000년 전 청년王… 왜 요절했을까[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2000년 전 금호강 일대에 살던 사람들을 울린 죽음이 있었다. 경북 경산시 하양읍 양지리에서 발굴된 목관묘 하나가 그때 만들어졌다. 무덤 주인공은 그 지역을 다스리던 인물인데, 20대의 나이에 세상을 뜬 것으로 밝혀졌다. 그의 무덤과 그곳에서 드러난 유물에는 그가 살던 시기의 어떤 면모가 담겨 있을까.
조사 막바지에 발견된 큰 목관묘
2009년 한국토지주택공사가 경북 경산시 하양읍 일대를 대상으로 추진하던 택지개발부지(약 130만 m²)에 대한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유적 존재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발굴은 2017년에 이르러 시작할 수 있었는데, 조사 대상지는 팔공산 자락이 차츰 낮아져 금호강 지류변 평야에 근접한 구릉이었다.
조사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땅속에서 그 옛날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자취가 속속 드러났다. 청동기시대의 마을 터를 필두로 조선시대 기와 가마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 가운데 조사원들의 시선을 끈 것은 Ⅱ지구라고 명명한 구역에서 찾은 기원전 1∼2세기의 옹관묘 수십 기와 5기의 목관묘였다. 영남지역에서 그 시기의 무덤이 발굴되는 사례가 드물기 때문이다. 다만, 출토 유물이 탁월하지 않아 ‘획기적 발굴’이라는 표현을 붙이기에는 부족했다.
날씨는 계속 추워지고 해가 바뀌기 전에 발굴을 마무리하기 위해 조사에 박차를 가하던 중 예상치 못한 발견에 제동이 걸렸다. 5기의 목관묘가 군집을 이룬 곳에서 남동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서 무덤구덩이 윤곽 하나가 확인된 것이다. 형태가 기왕에 조사한 목관묘와 같아 같은 시기의 것으로 보면서도 길이가 3.18m, 너비가 1.5m로 컸기에 약간의 기대감이 생겼다.
통나무 관 가득 채운 보물들
내부 흙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원래 봉분에 넣었던 토기 2점이 쓰러진 모습으로 드러난 데 이어 조금 아래에서는 토기 3점이 두 군데로 나뉘어 구덩이 모서리 쪽에 세워져 있었다. 여기까지는 서막에 불과했다. 기대하던 유물은 바로 그 아래부터 발견되기 시작했다.
바로 중국 전한 때 만들어진 청동거울 1점이 완벽한 보존 상태를 유지한 채 출토되었다. 조금 더 파자 어디부터 어떻게 노출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곳곳에 빼곡히 유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썩은 통나무 관 몸체와 한쪽 편을 막았던 것으로 보이는 목판 조각이 드러났고 관재 위에서 전한 청동거울이 추가로 출토된 데 이어 자그마한 말 모양 장식, 호랑이 모양 청동 버클, 청동 부품으로 장식된 칼집에 들어 있는 동검과 철검 여러 자루가 쏟아졌다. 그 밖에도 나무 표면에 옻칠한 부채 자루가 3점이나 나왔다. 이 시점에 이르러 하양읍 양지리 유적은 비로소 ‘역대급 발굴’로 진화했다.
조사원들 사이에서는 출토 유물로 보아 무덤의 연대가 경남 창원시 다호리 1호묘와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추정하면서 이 무덤도 다호리처럼 목관 하부에 요갱(腰坑)이라 불리는 ‘보물 구덩이’가 존재할 것으로 예상했다.
무덤 주인공 둘러싼 수수께끼
당대 최고의 물품을 집중적으로 소유한 이 무덤 주인공은 누굴까. 그 실마리는 목관 내에서 수습한 뼈에 들어 있었다. 이 뼈를 감식한 전문가는 성장기에 영양 공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 20대 남성의 뼈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조금 떨어져 자리하는 2호 목관묘가 이 인물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있는바, 그 무덤의 유물 부장 양상을 고려하면 그가 성장하면서 형편이 어려워 영양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했다기보다 지병 때문에 그리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원인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생전에 어떤 지위에 있었길래 당대 최고의 물품을 자신의 유택으로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일까. 그가 살았던 기원 전후한 시기에 영남지역 유력자들의 성장 기반 가운데 하나가 철 소재를 만들어 동아시아 각지로 유통하는 일이다. 막대한 양의 철 소재가 양지리 1호묘 목관과 시신 받침대로 쓰인 점 등을 고려한다면 그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시기의 무덤으로 경북 영천시 용전리 목관묘, 경주시 조양동 38호묘와 탑동 1호묘, 경남 창원시 다호리 1호묘 등과 비교해 보더라도 양지리 1호묘의 위상은 탁월하다. 중국 역사책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진한을 설명하면서 초기에 6개 나라가 있다가 3세기 무렵 12개 나라로 늘어났다고 했는데, 현재까지의 발굴 성과로 보면 양지리 1호묘에 묻힌 인물은 진한 초기에 활약했으므로 그는 6개 나라 가운데 한 곳의 리더, 즉 ‘왕’에 준하는 인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양지리 일대에 1호묘보다 이른 시기의 유력자 무덤은 있지만 그보다 늦은 시기의 것이 없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양지리 1호묘에 묻힌 인물의 죽음과 더불어 지역 패권의 추이가 경산시 임당동 세력 쪽으로 넘어간 것은 아닐까. 양지리 1호묘 단계에서는 임당동 일대 목관묘 쪽이 상대적 열세였으나 그 이후에는 그곳에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압독국이 두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연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양지리 1호묘에는 아직 풀지 못한 우리 고대사의 수수께끼가 가득하다. 장차의 세밀한 연구를 통해 하나하나 차례로 해명되길 바란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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