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의 세계화…‘그들은 범죄자’ 선동하는 트럼프들
사회적 약자나 정치적 반대세력을 ‘적’으로 규정한다. ‘적’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과 미래의 해악을 부풀린다. 사실 여부는 불문에 부쳐진다. 소문이 소문을 낳고, 억측이 억측을 낳는다. 믿음이 굳어질수록 적개심도 커진다. ‘증오 정치’는 세계적 현상이다.
2019년 12월 인도 의회가 시민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아프가니스탄·방글라데시·파키스탄에서 온 힌두교·불교·기독교 등의 종교를 믿는 이민자들의 시민권 취득 기간을 단축하는 게 뼈대다. 주요 종교 가운데 이슬람교만 제외했다. 14억 명 인도 인구 가운데 약 2억 명이 이슬람교도(무슬림)다.
수없이 반복되기에 힘을 얻는 이야기
인도 무슬림 공동체는 강하게 반발했다. 2014년 5월 힌두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나렌드라 모디 총리의 집권 이후 고용·교육·주거 등과 관련해 무슬림 차별이 심해졌다. 2020년 2월23일 뉴델리 북동부 자프라바드에서 시민권법 개정안 반대 연좌농성이 벌어졌다. 모디 총리가 이끄는 집권 인도인민당(BJP)의 지역 책임자는 경찰 쪽에 “당장 해산하지 않으면 직접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무슬림과 힌두교도 사이에 충돌이 시작됐다. 이틀 뒤인 2월25일 흉기와 둔기, 총기로 무장한 힌두교도들이 무슬림 집단 거주지로 들이닥쳤다. 유혈 사태는 나흘간 이어졌다. 당시 폭동으로 무슬림 36명을 포함해 모두 53명이 숨지고, 2200여 명이 체포됐다.
“증오는 타자화한 집단의 ‘범죄’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정치적 반대세력이 추진하는 정책이 타자화한 집단에 이익이 될 때, 반대세력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기 위해 정치인들은 증오를 부추기는 이야기를 공급한다. 그 이야기가 진실이기 때문에 영향력이 생기는 게 아니다. 수없이 반복되기 때문에 힘을 얻는다. 수용자가 이야기의 진실성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받아들일 때 증오가 형성된다.”
에드워드 글레이저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는 2004년 10월 쓴 논문 ‘증오의 정치 경제학’에서 이렇게 짚었다. 백악관 재입성을 노리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자타가 공인하는 ‘증오 정치’의 대가다. 2016년 대선 때 그는 ‘분리장벽 건설’을 으뜸 공약 중 하나로 제시했다. 멕시코와 맞닿은 3천㎞ 넘는 국경을 따라 장벽을 건설해 불법 이민자 유입을 막겠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멕시코)이 문제가 많은 사람들을 미국으로 보내고 있다. 그 사람들이 숱한 문제를 미국으로 가져오고 있다. 그들이 마약을 미국으로 가져온다. 그들이 범죄를 미국으로 가져온다. 그들은 성폭행범이다. (…) 남부 국경지대에 커다란, 아주 거대한 장벽을 건설하겠다. 장벽 건설 비용은 멕시코가 내게 하겠다.”
세상을 ‘그들’과 ‘우리’로 나누면, ‘우리’가 아닌 모두는 ‘그들’이 된다. ‘우리’가 정의고, ‘그들’은 불의다. 2022년 브라질 대선을 불과 한 달 앞두고 벌어진 일련의 폭력 사태는 정치 목적으로 ‘조작된 증오’가 얼마나 맹목적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룰라 지지자란 이유로 죽이고 때리고
2022년 9월9일 중서부 브라질 마투그로수주에서 현직인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 지지자인 하파에우 시우바 올리베이라가 3선 도전에 나선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대통령 지지자인 베네디코 카르도주 산투스와 언쟁을 벌이다 흉기를 휘둘러 살해했다. 9월19일엔 북동부 페르남부쿠주에서 보우소나루 대통령 지지자들이 룰라 전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표지를 단 시각장애인을 지하철역에서 집단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9월24일 북동부 세아라주의 한 술집에서 보우소나루 대통령 지지자인 에드미우송 프레이리가 “여기 룰라 지지자 있느냐”고 외쳤다. 카를루스 시우바가 손을 들어 보이자, 프레이리는 대뜸 그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시우바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9월25일엔 남동부 미나스제라이스주에서 선거유세를 하던 노동자당 소속 연방 하원의원 파울루 게지스에게 총격이 퍼부어졌다. 게지스는 가까스로 몸을 피했다. 붙잡힌 총격범은 사복 경찰이었다.
금속노동자 출신인 룰라 대통령은 2003년 1월 집권해 재선에 성공하며 2010년 12월 임기를 마쳤다. 그의 임기 동안 줄잡아 2천만 명이 빈곤층에서 벗어났다. ‘룰라의 후계자’인 노동자당의 지우마 호세프가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오랜 군사독재(1964~1985년) 기간에 정치·경제·언론 권력을 장악한 기득권층은 선선히 물러서지 않았다. 2014년 3월 브라질 검찰은 국영기업 등을 대상으로 ‘세차 작전’으로 명명한 대대적인 반부패 수사에 착수했다. 룰라 대통령은 뇌물 수수와 돈세탁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 2014년 재선에 성공한 호세프 대통령도 2016년 8월 말 의회의 탄핵으로 결국 축출됐다. 브라질 대법원은 2021년 3월 룰라 대통령에게 유죄를 선고한 하급심 재판부가 검찰과 공모해 편향된 판결을 내렸다며 원심 판결을 취소시켰다. 그가 대선에 다시 나설 수 있었던 이유다.
끝내 패배를 인정하지 않은 보우소나루
2019년 집권한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남미의 트럼프’를 자처했다. 소수자를 겨냥한 혐오 발언과 부자감세·민영화 추진으로 기득권층의 강력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의 집권 기간에 아마존 밀림은 파괴됐고, ‘코로나19’를 가벼운 감기쯤으로 치부한 탓에 사망자가 70만 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그럼에도 ‘룰라의 복귀’를 우려한 기득권층의 반발은 예상보다 강력했다.
2022년 10월30일 실시된 대선 결선 투표에서 룰라 전 대통령은 50.9%,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49.1%를 각각 얻었다. 득표율 차이는 1.8%포인트, 브라질 대선 사상 최소 표차였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12월3일 브라질 최고선거법원(TSE)은 예정보다 일주일 앞당겨 룰라 대통령의 당선을 최종 확정했다. “선거 결과를 놓고 다투는 반민주적 움직임을 진정시켜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앞서 보우소나루 대통령 지지자들이 수도 브라질리아의 연방경찰청 청사 ‘접수’를 모의하다 발각돼 체포됐다. ‘조작된 증오’가 만들어낸 광기였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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