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면 죽어야지” 아닌 “아파도 괜찮다” 말하는 사회[인스피아]

김지원 기자 2024. 1. 15.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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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일’ 아닌 돌봄
아픈 엄마를 돌보느라 어린 시절을 잃어버린 아이…
가족 간병으로 고립과 절망을 겪는 이들에게 필요한 건
경제적 지원 외에 서비스가 아닌 ‘관계’로서의 돌봄
초고령사회, 우리 모두는 각자도생 슈퍼맨이 아니다

지난해 11월 통계청이 ‘인생의 대차대조표(국민이전계정 표시)’를 발표했습니다. 0세부터 85세까지 그래프를 그려 흑자 구간과 적자 구간을 나눈 것인데요. 댓글에는 ‘젊었을 때 바짝 벌지 않으면, 적자 구간에 답이 없다’ ‘결국 나이 들면 돈밖에 의지할 곳이 없다’ 등이 적혀 있었습니다. 으레 ‘늙음’이나 ‘병’과 관련된 기사의 단골 반응인 ‘아프면 죽어야지’ 등의 이야기도 빠지지 않습니다.

단지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이더라도 ‘슈퍼맨’이 되어야 하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프거나 나이가 들거나 가족이나 본인이 장애를 갖게 되면 ‘힘듦’을 넘어 거의 가족의 생사가 걸린 문제가 되는데요. 그 안에서 우리는 누구에게 도움을 받기도 어렵고, 오로지 스스로 헤쳐가야 합니다.

질문들이 꼬리를 잇습니다. 과연 이처럼 장애나 질환 등을 오직 ‘슈퍼맨 같은 개인’에게 떠맡기는 사회는 긍정적인 사회일까? 사람들은 각자 최대한 어떻게 하면 적자 구간을 줄이고 흑자 구간을 늘릴지만 고민하면 되는 걸까? 물론 국가의 지원 정책이 더 늘어나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오늘 글에서는 ‘돌봄’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

엄마 손을 붙잡고 병원에 다녀오던 전철 안이었습니다. 하차 안내방송이 흘러나왔고,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요. 갑자기 엄마가 ‘나’의 뺨을 때리곤 전철 바닥에 대(大)자로 드러누워버렸습니다. 전철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죠. 여기서 ‘나’는 여덟 살 난 꼬마이고,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의 저자 나가노 하루가 직접 겪은 어린 시절의 평범한 일상 풍경입니다.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는 여덟 살 때부터 ‘영케어러’(가족돌봄아동)로 살아온 저자가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써낸 에세이인데요. 어머니는 저자가 여덟 살이던 해 조현병이 발병했고, 주변엔 도움을 줄 만한 친척이 없었습니다. 평소 어머니를 병원에 데려가고, 약을 챙기는 등의 ‘일상 돌봄’뿐 아니라, 학교 갈 준비를 하는 등의 일은 오직 저자의 몫이었죠. 이 책의 제목인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는, 살아남기 위해 저자가 가져야만 했던 굳센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핵심 문구입니다.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처럼 초탈한 마음으로, ‘모든 일상’을 완벽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렸던 시절의 나는 영원히 살 것만 같은 황금의 몸과 만 년 동안 살아온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신에 가까운 존재라는 의식을 지니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 정도로 만능이 아니면 살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생겨난 생명의 폭발력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책의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어린아이가 어떻게 이렇게 생각이 깊고 야무질까?’라는 생각이 자주 드는데요. 그런데 반전이 있습니다. 책의 진짜 메시지는 “그 어떤 아이도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처럼 살 수 없고, 살아선 안 된다”입니다. ‘하루는 참 대단하다’가 아니라요. 저자는 어릴 때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처럼 절박하게 버텼던 탓에, 성장하면서 굉장한 ‘후폭풍’에 시달립니다. 고교 땐 관심을 받기 위해 자해를 하고, 제2형 양극성장애에 시달리고,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저자는 “내 인생은 거의 대부분이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 시절의 후유증”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이 아이가, 위태위태하게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처럼 살게 만들었을까요? ‘고립’입니다. 모두가 ‘남의 일’로 바라보았습니다. 저자의 마음속엔 전철에서의 소외의 기억이 깊이 박혀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결코 주변 사람은 나와 가족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는 처절한 소외와 낙담의 경험이었죠. ‘정상 사회’는 아주 작은 이상함도 용인하지 않았고, 장애인과 사회를 잇는 모든 연결고리를 끊었습니다. 이 때문에 적당히 사회와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모든 부담은 본인과 가족이 져야만 했죠. 저자는 만약 여덟 살 때 전차에서 누군가 한 명이라도 손을 내밀어주었다면 자신은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처럼 혼자서 모든 걸 지고 살아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 회상합니다.

■병, 장애라는 ‘낭떠러지’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를 다 읽고선 마음이 무거워졌는데요. 최근 국내에서도 이슈가 되기 시작한 ‘영케어러’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아빠의 아빠가 됐다>의 저자 조기현은 이 책의 추천사에서 아이의 ‘성장권’을 지켜주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한창 ‘돌봄을 받아야 하는’ 나이의 아이가 돌봄 제공자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은 가혹합니다. 그런데, 왠지 이 책을 덮는 순간 문득 질문 하나가 머릿속을 북적하게 메웠습니다. 그런데, 이미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처럼 살고 있지 않았나? ‘만 년 동안 살았던 어른’이라면 과연 괜찮은 것인가?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은 다양한 상황에서 어떻게 가족의 ‘질병, 장애’가 순식간에 본인은 물론이고 한 가족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지를 신산하게 보여준 기획입니다. 당사자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렌즈를 ‘간병인’에 가져다대면서 우리가 간과했던 간병-가족의 처우 문제에도 사회가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만든 기회가 되었죠. 이 책에는 다양한 직업, 성격, 나이, 소득, 집안환경 등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는데요. 이들의 공통점은 가족 중 누군가 한 명이 병에 걸리면서 그야말로 ‘절망의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병원비로 가계가 기울고, 독박 돌봄으로 가족 중 누군가가 일자리를 잃고, 고립되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등 악조건의 연속입니다. 이 책에 등장한 한 남성은 발달장애인 큰아들로 인해 직장을 그만두고, 둘째아들은 파혼을 당하고 돌봄으로 인해 힘들던 중 자신마저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수십년간 돌봐온 큰아들을 살해하기에 이릅니다.

이 책은 ‘비극 진단’에 이어 커다란 분석과 대책을 내놓습니다. 정부의 생활비·병원비 지원, 간병인 휴가제도 도입 등입니다. 당연히 물질적 지원 역시 필수입니다만,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에 이어 이 책에서도 제가 주목해보고 싶은 부분은 ‘고립’이라는 키워드였습니다.

가족간병인들이 심층 인터뷰 중 언급한 단어들 가운데선 의외로 ‘돈’만큼이나 ‘여가활동’이라든지 ‘일상, 성취(직장, 학교)’ 관련 단어가 높은 비중을 차지했는데요. 간병인들은 돈이 부족한 상황만큼이나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자신의 일상적인 성취, 관계를 누리지 못하는 상황에 절망을 느꼈습니다. 이 때문에 책에선 간병인 파견을 통해 잠깐이라도 간병 부담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레스핏 케어’의 필요성이 강조되기도 하죠.

만약 절망의 끝에 내몰렸던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고민을 나누고, 심리적으로라도 지지를 받고, 돌봄 과정에서의 고민을 나누고, 가끔씩 한숨 돌릴 수 있었다면. 가족 바깥에서 느슨한 돌봄이 이어졌다면 이렇게까지 간병인들이 극한으로 내몰렸을까요? 결국 이 책을 읽고 나면 ‘가족간병’이라는 틀을 깨고, 더 느슨한 돌봄들을 여러 겹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어 ‘아픈 채로’ 살고, 간병하면서도 일상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아픔이 낭떠러지가 되지 않기 위해선?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의 강연을 엮어낸 책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2020)는 ‘과연 돌봄은 서비스일까’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그건 과연 ‘정책만으로 충분한 것일까’라고요.

우선 잠깐 제목의 의미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면, ‘새벽 세 시’란 사람이 가장 아프고 심산한 시간입니다. 저자들은 우리가 ‘충분히 건강하고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어느 정도 각자 비정상, 취약함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 기본 눈금을 가져다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언제든 3일 철야를 하고 3차까지 회식을 가고도 멀쩡하게 다음날 출근해서 또 야근할 수 있는 몸(물론 운동, 집안일, 육아도 척척!)’을 기본으로 삼을 게 아니라 ‘언제든 아플 수 있고, 또 어딘가 부족한 상태로도 살아갈 수 있는 몸’을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거죠.

책의 핵심은, 돌봄은 서비스라기보단 ‘관계’라는 것입니다. 돌봄을 서비스로 본다면, 여전히 돌봄을 뱁새가 물어다주듯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덥석’ 제공해주어야 하는 ‘선물꾸러미’ 같은 것으로 여기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물론 기본적인 정책도 꼭 필요하지만 저자들은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우리가 취약하다는 것을 깨닫고, 서로 겸허하게 의존하고 또 지탱해주는 연결된 사회적 분위기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우리 스스로의 노력도 필요하고요.

저는 앞서 읽었던 책들을 지팡이 삼아 ‘관계’를 중심에 둔 돌봄 사회가 가능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연습’들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곰곰 궁리해보았습니다. 특히 돌봄을 받는 사람들 역시 ‘돌봄을 받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우리는 돌봄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치 바구니에 들어 있는 과자처럼 당연히 받을 수 있는 무언가로 생각하곤 하지만, 결국 당연하게도 ‘관계’입니다.

가족이나 연인, 회사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하고, 고마움과 미안함을 잘 표현해야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듯 평소 이런 노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평소 남에게 의지하거나 돌봄을 제공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돌봄을 ‘잘 받을’ 수도 없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과연 각자도생·자력갱생의 사회에서, 오직 자신의 힘만 믿고 남을 돌보지 않고 앞만 향해 경쟁적으로 달려왔던 사람이 아프다고 해서 갑자기 자신의 취약함을 진솔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만약 평소에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고, 돌봄에 아무런 참여도 하지 않고 남에게 전혀 의지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자신이 취약해진 상황 자체에 분노와 모멸감을 느끼고, 고마움은커녕 돌봄자에게 억하심정을 퍼부을 수 있습니다.

돌봄자도 환자도 서로 감정을 주고받는 동등한 관계라고 생각하고 서로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면 ‘지옥 같은’ 간병도 조금은 수월해질 수 있겠죠.

마지막으론, 제3자들 역시, 미래의 환자 혹은 돌봄자로서 돌봄을 주고받는 연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초고령사회가 오면서, 불과 10년 후 정도만 돼도 우리 주변에는 노인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질 텐데요. 그냥 ‘큰일 났다!’ 하면서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제각기 고립될 수밖에 없겠죠.

결국은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저자들의 말처럼, 우리 모두가 ‘각자 슈퍼맨’이 아니라 ‘취약해도’ 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관계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맺음말

오늘 레터에서는 돌봄을 ‘관계’의 측면에서 바라보았습니다. 평소 관계맺음의 연습이 되어 있지 않은 사회에서, 누군가 아프다고 해서 갑자기 좋은 돌봄이 바닥에서 뿅, 하고 튀어나올 리가 없습니다. 환자든, 간병인이든 고립되고 독립적인 삶을 살지 못할 때 한층 더 우울해집니다.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의 하루가 어머니의 장애보다, 냉담하게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에서 더 큰 공포와 외로움을 느꼈듯이요.

그리고 오늘 레터에서 살펴보았듯, 병과 고립은 필연적인 관계가 아니라 ‘우리’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 개선 가능한 것입니다. “아프면 죽어야지”라고 말하는 세상이 아니라, “아파도 괜찮다”고 모두가 말하는 사회. 어린 하루에게 손 내밀어주는 사회, 내가 언젠가는 아플 수 있기 때문에 아픈 사람을 존중하는 사회, 삶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봐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관계’를 향한 진솔한 노력은 -비단 질병 및 간병 문제 외에도- 이 시대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초석이 되지 않을까요?

이 글은 인문교양 뉴스레터 <인스피아>에 실린 내용을 수정한 것입니다. 더 많은 글을 보고 싶으시다면 아래 QR코드를 촬영하거나, 포털에 ‘인스피아’를 검색해서 구독해주세요.

김지원 기자 deepdeep@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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