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아픔을 ‘듣고 → 말하는’ 해피 뉴 이어

기자 2024. 1. 15.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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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뉴 이어!’ 해를 넘으며 가장 많이 오고 갔을 표현이다. 하지만 단지 해가 바뀌었다고 사회의 모든 영역이 일순간 ‘해피’하게 전환될 수는 없다.

오히려 각종 지표는 그 반대로 향하는 듯하다. 실제로 5년 사이(2018~2022년) 정신질환자가 37% 증가했고, 2022년에는 처음으로 연간 우울증 환자가 100만명 시대에 진입했다. 즉, 이제 50명이 모이면 그중 한 명꼴로 우울증 진료를 받고 있는 셈이다. 이것과 더불어 지난 5년 사이 초중고 학생의 우울증이 60.1%가 증가했다는 점, 2022년 10대·20대·3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점 역시 눈을 뗄 수 없는 지표들이다.

이처럼 부정할 수 없이 한국인은 과거 여느 때보다 우울한 상태로 새해를 맞이했다. 2023년에 자살률이 소폭 하락했다고 절대로 안심할 수 없다. 여전히 한국인의 자살률은 경제협혁개발기구(OECD) 평균의 2배 이상으로 최고 수준에 머물러 있다. 2023년 3월 유엔 산하기관에서 발표된 행복지수만 보아도 한국은 137개국 중 57위, OECD 38개 회원국 중에서는 35위에 해당한다. 전문가들은 한국인의 높은 자살률 원인 중 하나로 ‘현저히 낮은 우울증 치료율’을 꼽는다. 중등도 이상의 우울증만 따져도 우울증 치료율이 미국의 6분의 1 수준이라 한다. 요컨대,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무기력해진 한국인들이 증가하고 있는 반면, 이들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심리학자 김태형은 이런 한국사회를 ‘풍요중독사회’라 칭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이 주창한 ‘풍요의 역설’처럼, 경제적 수준이 향상되었음에도 삶의 질과 행복이 비례는커녕 반비례하는 현실에 대한 지적이다. 나아가 그는 풍요와 함께 동반되어야 할 ‘화목’이 부재함을 꼽는다. 여기서 무엇이 ‘화목한 것인지’에 대해 기준이 다를 수 있지만, 최소한 자신의 우울함과 같은 고통을 주변에 말할 수 있는 사회여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자신의 고통을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또 다른 고통의 시작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관련해서 철학자 한병철은 현대인이 일명 ‘고통 없는 사회’, 즉, 고통을 유발할 수 있는 상황을 극도로 두려워하며, 타인의 고통을 듣는 것조차 거부하는 등 ‘만성 마취’ 속에서 살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고통은 쉽게 개인적 문제, 의학적 문제로 치부된다고 보았다.

저널리스트이자 임상심리학 교수인 앤드루 솔로몬은 <한낮의 우울(The Noonday Demon)>에서 우울이라는 심리적 고통을 치유하는 법을 소개한다. 그중 그린란드에 거주하는 이누이트족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의 현실에 큰 울림을 준다. 솔로몬에 따르면, 이누이트족의 80%가 우울증을 앓고 있으며, 자살률도 높아 일부 지역에서는 매해 인구의 0.35%가 자살을 한다고 전해진다. 이유가 무엇일까? 이누이트족은 북극권의 혹독한 기후와 어두운 계절 탓에 좋든 싫든 온 가족이 한데 모여 장기간 생활을 해야만 한다. 그로 인해 불평을 하거나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는 것이 금기시되었으며, 타인의 문제를 알아도 간섭하지 않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즉, 허물없이 지내기에는 ‘너무 가깝고’, 각자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살기 때문에 남에게 ‘짐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누이트족에게 혹독한 자연 속 개인의 고통은 그저 안으로 삭히는 것일 뿐이었다. 왠지 ‘고통 없는 사회’ ‘풍요중독사회’로 불리는 한국사회와 많이 닮아 있는 듯하다. 차이라면 그들은 자연적 재난에, 한국인은 사회적 재난에 더 많이 노출되었다는 점이지 않을까. 솔로몬은 그곳에서 심리상담을 이끌고 있는 세 명의 여성원로부터 어떻게 주민들의 우울증과 자살 문제를 도울 수 있었는지 듣게 됐다. 그들의 답변은 간단명료했다. 슬픔의 진정한 치료제는 “다른 이들의 슬픔을 듣는 것”이었다. 안으로만 삭혔던 고통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그리고 얼마나 좋은지 깨닫게” 했다.

결국,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사회는 과연 얼마나 타인의 고통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을까. 새해가 밝자마자 서로의 행복을 기원하는 말들을 수없이 교환했지만, 정작 언제든 들어줄 수 있다고 덕담을 나누진 않았을 테다. 이누이트족 원로는 듣는 것이 곧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라 했다. 듣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나도 바라던 행복에 도달하기 힘들지 모른다.

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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