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의 해, 무등산 ‘민주주의 영혼’이 세계로 뻗어가길”

정대하 기자 2024. 1. 15.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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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립미술관 초대전 여는 박소빈 작가

‘용의 신화, 무한한 사랑’이라는 주제로 광주시립미술관 초대전을 여는 박소빈 작가. 정대하 기자

“청룡의 해를 맞아 새로운 신화가 광주에서 시작돼 세계로 뻗어갔으면 좋겠어요.”

‘용의 작가’로 불리는 박소빈(52) 작가는 지난 12일 광주시립미술관 전시실 3층 들머리에 걸린 신작 ‘용의 부활-무등의 신화’ 앞에서 환하게 웃었다. 그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초대전 ‘박소빈: 용의 신화, 무한한 사랑’을 3월24일까지 연다. 전시된 그림 속 청룡은 광주 5·18민주광장에서 꿈틀거리다가 무등산을 향해 승천한다. 용 몸체의 흑색 머릿결엔 1980년 오월 시민집회 풍경이 원형으로 똬리를 틀고 있다. 박 작가는 “무등산 줄기에서 시작된 민주주의 영혼이 광주에서 부활하길 바란다”고 했다.

박소빈 작가의 신작 ‘용의 부활-무등의 신화’.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30여 점의 대형 작품 중 눈에 띄는 작품은 17m 길이의 ‘부석사 설화-새로운 신화창조’다. 신라 고승 의상과 선묘 여인의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2017년 중국 베이징 진르(금일)미술관 현장에서 49일간 직접 연필을 깍아 가면서 용과 여인의 애틋한 사랑을 그리는 현장 퍼포먼스를 통해 완성한 작품이다. 박 작가는 “관객들과 직접 만나 작품 제작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진르미술관 현장 퍼포먼스 이후 처음으로 이 작품을 공개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화엄사 그림서 영감받은 ‘용의 작가’
베이징서 49일간 퍼포먼스로 완성한
‘부석사 설화…’ 연필화 작품 첫 공개
코로나19때 지독한 격리로 주술하듯
소통·관계 기원한 ‘문자화’도 선보여

2월엔 항저우 충더미술관서 개인전
4~11월 베니스서 전시 이어갈 예정

2011년 광주시립미술관 추천으로 베이징 레지던시 작가로 갔던 그는 베이징의 ‘포스 갤러리’와 인연을 맺어 5년 전속 작가로 활동했다. 박 작가는 “지금은 중국 대학 2곳에서 실기 강의를 하며 뉴욕과 유럽 등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21살, 시대의 자화상’(1993).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전시장엔 20대 때 그렸던 몇점의 유화들도 전시됐다. ‘21살, 시대의 자화상’(1993)은 알몸을 ‘터치’한 붓끝의 예리함과 그림 속 여성의 눈빛이 강렬했다. 그 해 그렸던 ‘포옹’은 광주미술인공동체가 5월 금남로 거리 전시회 때 선보였던 작품이다. 박 작가는 “당시 5·18과 광주정신을 해부학적으로 풀어 영혼을 들추고 싶었다. 알몸을 거울에 비추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작업했다”고 말했다. 이 작품들은 격정적이었던 당시 민중 미술계에선 낯선 시도로 여겨졌다.

17m 길이의 캔버스에 연필을 깎아 가면서 중국 진르미술관에서 그린 ‘부석사 설화-새로운 신화창조’. 정대하 기자

그러다가 박 작가는 연필을 만났다. 디지털 시대에 가장 아날로그적인 도구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사유의 힘’이었다. 조선대 대학원에서 동양미술사를 공부했던 그는 “나의 것이 무엇인지를 보이지 않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동양적인 미학을 찾아가던 길 위에서 만난 게 연필이었다. 한국수묵화의 담백함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던 먹처럼 연필의 단색화에 끌렸다. 그림의 소재도 단순해졌다. 대학 4학년 때 전남 구례 화엄사에서 대웅전을 타고 오르는 용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던 그는 그림의 소재로 용을 선택했다.

박소빈 작가가 그림을 그리면서 썼던 연필에서 나온 연필밥을 활용해 만든 오브제 `더 드리밍\'.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박 작가의 작품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는 스승 고 원동석 목포대 미술학과 교수였다. 원 교수는 “한국 근현대 미술의 외세 추종주의”를 비판했던 한국민중미술의 대표적인 이론가이자 평론가였다. 박 작가는 “교수님을 만나면서 예술을 보는 눈이 바뀌었다. 나와 지역, 한국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세계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원 교수는 제자의 연필화 작업에 관해 “마치 불화를 제작하는 화공의 공력과도 같은 진지한 자세로, 독자적인 세계를 연필화로 개척했다”고 평가했다.

박 작가의 연필 드로잉은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미국 뉴욕시립대 탈리아 브라초풀로스 교수는 2006년 광주비엔날레에 왔다가 시립미술관 입주작가 작업실에서 박 작가의 그림을 봤다. 미술평론가이자 큐레이터이기도 한 브라초풀로스는 뉴욕 텐리 갤러리(2007)와 첼시 뮤지엄(2009)에 박 작가를 초대했다. 다음 달 중국 항저우 충더(숭덕)미술관에서 2층 전체 전시 공간을 활용해 개인전을 연다. 4월부터 11월까지 제60회 베니스비엔날레가 열리는 기간에 베니스 산비달아트센터 갤러리에서 ‘용과 여인’의 세계를 그린 대표작 등을 전시한다.

박소빈 작가가 코로나19 시기에 그린 문자화 ‘I See You, UMMA’(2021).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박 작가는 늘 새로운 것을 찾아다닌다. 유화에 이어 연필화를 선보인 그는 ‘문자화’를 발굴했다. 이번 전시회에도 ‘문자 드로잉’ 작품과 그 과정을 보여주는 오브제를 선보인다. 박 작가는 “코로나19 시기의 지독한 격리 경험은 마치 샤먼이 주술을 하듯이 기원문을 써가게 했다. 문자 그림을 통해 소통과 관계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다”고 했다.

박 작가의 30년 작품세계를 돌아보는 자리가 마련된다. 광주시립미술관(관장 김준기)은 오는 18일 오후 2시 박 작가 작품이 중국 및 서양의 현대미술에서 차지한 위치 등에 관해 이야기하는 심포지움을 연다. 리처드 바인 ‘아트 인 아메리카’ 전 편집장, 탈리아 브라초풀로스 교수, 주치(朱基) 중국 평론가 겸 기획자, 박구용 전남대 교수(철학과), 박천남 독립큐레이터 등이 발표자로 참여한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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