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욱의 한국술 탐방 | 정헌배인삼주가 정헌배 연구소장] “홍삼을 넣어 발효시킨 인삼증류주 22개국 고객이 사전 주문”
인삼은 자체만으로는 발효가 안 되는 약재다. 발효되려면 기본적으로 전분(나중에 당분으로 바뀐다)을 함유하고 있어야 하는데, 인삼에는 전분 함유량이 거의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대부분 인삼주가 담금술에 인삼을 뿌리째 넣어 침출시키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왔다. 인삼이 통째로 들어가 있어 그냥 보기는 근사하지만, 인삼 고유의 성분이 충분히 술에 배지는 못한다. 발효를 통해 화학적 결합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삼주가 이런 술이다 보니, 외국 술 전문가 입맛에는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최고의 양조 전문가로 알려진 이종기 오미나라(경북 문경) 대표에게도 기억하기 싫은 ‘흑역사’가 있다. 1990년 두산씨그램 차장 시절, 1년 예정으로 유학한 영국 스코틀랜드 헤리오트와트대 양조학 석사 과정을 밟을 때 얘기다. 25개국에서 온 학생 40여 동기생이 학기 도중에 담당 교수 제안으로, 각 나라에서 가져온 술을 같이 맛보는 이벤트가 열렸다. 일본 학생이 가져온 사케는 호평을 받았지만, 한국의 이종기 학생이 내놓은 인삼주는 혹평을 받았다. 인삼주 맛을 본 교수는 “한국에선 술과 약을 구분하지 않나 보지”라는 농담을 할 정도였다.
그때 이종기 학생이 선보인 술이 희석식 소주에 인삼 한 뿌리를 넣어 2~3년간 침출시킨 전형적인 ‘한국 인삼주’였다. 희석식 소주는 어떤 술인가. 외국산 타피오카를 원료로 만든 알코올 도수 95도 주정에 물을 많이 탄 저렴한 술이다.
그런데 인삼을 발효시켜 증류한 뒤 3년 이상 동굴에서 숙성시킨 진짜배기 인삼증류주를 만드는 양조장이 있다 하여 찾아가 봤다. 경기도 안성의 정헌배인삼주가가 바로 그곳. 이곳 양조장은 인삼을 건조해 홍삼으로 만들고 가루를 낸 후 쌀 ,누룩, 물과 함께 발효시킨 뒤 증류를 거쳐 최소 3년 이상 숙성시킨 뒤 병에 담은 인삼주를 세상에 내보낸다. 2008년 세상에 처음 나왔을 당시 정헌배인삼주는 전통주 업계에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4000개 술 항아리에 장기 숙성
서울 강남에서 차로 1시간 남짓 걸려 찾아온 양조장은 깊은 산의 절처럼 조용했다. 술 사러 찾아오는 고객도 거의 없는 듯했다. 리뉴얼 공사를 하고 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숙성고(증류한 인삼주 원액을 10L 항아리에 담아 숙성하는 곳)에는 장기 숙성 중인 술 항아리가 4000개에 달한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시장에 내다 팔 술은 또 없다고 했다. 10L 항아리 한 통의 술을 모두 꺼내 병에 담으면 10병이 훨씬 넘는 제품이 만들어진다. 이런 술 항아리가 4000개가 넘는다고 자랑하면서 정작 팔 술은 아예 없다니 도대체 이 양조장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정헌배인삼주가의 대표는 이명숙씨다. 그러나 인삼주를 만드는 건 그의 남편이자, 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정헌배 중앙대 명예교수다. 그의 이력은 화려하다. 정헌배 소장은 영남대 경영학과를 졸업, 술 연구를 위해 프랑스 유학을 선택했다. 그리고 1984년 파리9대학에서 술 마케팅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우리나라 ‘술 박사 1호’로 알려지기도 했다. 1985년부터 2021년까지 중앙대 교수로 재직했다. 정 명예교수는 농림부 전통주 심사위원 등을 맡기도 하며, 우리나라 주류 산업 정책 변화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해 왔고, 2011년에는 ‘술나라 이야기’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가 지금의 정헌배인삼주가 양조장을 차린 것은 2003년이다. 정헌배인삼주를 처음 내놓은 것은 2008년이다. 우연한 기회에 지금의 안성 양조장 인근 땅 약 20만㎡(6만 평)를 샀고, 신규로 짓고 있는 공장을 포함해 약 6600㎡(2000여 평)를 양조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때 인근을 ‘인삼주 테마파크’로 조성할 것을 꿈꾸기도 했지만, 아직 실현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지금은 대부분의 땅을 장뇌삼을 비롯한 매실, 복분자 등의 연구용 원재료 공급처로 활용하고 있다. 정 소장은 “하도 땅이 넓어 ‘대단위 아파트를 지어주겠다’며 부동산 개발 업자들이 요즘도 가끔 찾아온다”고 말했다.
그가 만드는 인삼주는 시중의 여느 인삼주와는 다르다. 쌀, 누룩, 물 그리고 홍삼 가루로 막걸리를 만든다. 발효 기간은 12일 정도, 발효가 끝난 술의 알코올 도수는 16~18도. 홍삼을 일부 넣었지만, 발효 직후의 알코올 도수는 순수 쌀막걸리와 비슷하다. 발효가 끝난 술은 곧바로 증류기에 붓지 않는다. 20~30일 안정화(숙성) 기간을 꼭 거치는데, 이는 술의 풍미를 한층 깊게 하기 위해서란다.
안정화를 거친 뒤 증류한 술을 10L 항아리에 담아 최소 3년간 숙성을 거친다. 그런데 술은 이 단계에서 술 항아리째 팔린다. 10L 술 항아리 하나 값이 200만원. ‘주문생산 방식’이라 고객이 요청할 때마다 술을 내린다(증류한다). 고객이 낸 비용에는 3년 숙성 비용까지 포함돼 있고, 3년이 지나 고객이 원할 경우 항아리에 있는 술을 모두 병에 담아 준다. 그리고 그 이상 숙성을 원할 경우 한 달에 3000원씩 추가 숙성비를 받는다. 정 소장은 “대부분은 3년 때 찾지 않고 추가로 계속 술을 숙성시킨다”며 “오래된 술은 10년이 훨씬 지난 것도 꽤 있다”고 말했다. 고객들은 결혼 30주년, 고희 같은 특별한 날에 즈음해 술을 찾아간다.
22개국 고객으로부터 주문생산
주문생산 방식의 장점은 분명 있다. 현재 숙성고에는 22개 국적의 고객이 사놓은 술이 항아리에서 익어가고 있다. 정헌배 소장의 얘기를 좀 더 들어보자. “현재 숙성고에는 세계 22개 국적의 고객이 주문한 술들이 잠자고 있다. 아마 국내 어느 양조장에서도 여기만큼 글로벌 고객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이곳 양조장은 내국인도 거의 모른다. 그러니 외국인이 이곳 양조장을 어떻게 알겠나. 하지만 외국인은 술을 투자 가치로 보기 때문에 거액을 미리 지불하고 3년 후에나 받을 수 있는 술을 산다. 한국과 비즈니스하는 외국인이라면, ‘경기도 안성에 술 한 항아리 갖고 있다’는 게 한국 거래처 바이어에게 얘기하기 좋은 화젯거리 아니겠나. 게다가 술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상품이다. 10년 지나 1000만원이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주식 투자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양조장을 찾은 기자는 정작 인삼주를 한 모금도 시음하지 못했다. 정 소장이 밝힌 사정은 이랬다. “2000년대 초반부터 양조장을 운영하고 있지만, 20만㎡가 넘는 부지를 매입한 탓에 자금에 늘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만든 인삼증류주는 최소 3년은 숙성을 거쳐야 제대로 된 술이 되는데, 내가 3년을 기다릴 (자금)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주문생산 방식을 도입, 증류가 끝난 술은 모두, 돈을 미리 받고 숙성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 숙성고에 있는 4000개의 술 항아리는 이미 임자가 정해져 있는 고객 술이다. 그러니 내 소유의 술은 아예 없다. 참으로 안타깝고 아쉽다. 적어도 20~30%는 양조장 소유의 술로 갖고 있었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는 일반인에게 선보일 인삼주도 생산할 생각이다.”
그렇다고 정헌배인삼주가에서 팔 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서울의 미슐랭 2스타 식당인 정식당 등에 납품하고 있는 정헌배인삼 약주 ‘비’가 있다. 알코올 도수는 16도로, 일반 약주에 비해서는 약간 높다. 홍삼을 갈아서 넣은 까닭으로 술에 흙 향(earthy)과 누룩 향이 약간 있다. 오래 숙성한 위스키에도 흙 향이 나는 경우가 더러 있어, 흙 향 자체는 별로 반감이 없다. 누룩 향도 도드라지지 않은 편이다. 500㎖ 한 병에 5만원. 인터넷 판매도 곧 시작할 참이다. 양을 조금 줄여 가격을 낮출 생각도 있다. 일부 고객과는 협의를 거쳐 고객 소유의 인삼증류주를 양조장에서 직접 외부 판매해, 수익금을 나눌 방안도 타진하고 있다고 한다. 정헌배인삼주가 일반인에게 더 알려지고, 또 애주가들이 인삼주를 실제로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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