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만 명’ 신용사면에 “생색은 정부가, 리스크는 금융권이” 부글부글

정윤성 기자 2024. 1. 15.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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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체자 신용점수 상승…대출 및 카드 발급 등 금융거래 숨통
금융권, 부실 리스크에 긴장…“대출 심사 까다로워질 수도”
성실 차주 역차별 우려도…“신용점수로 지원하는 접근 방식이 문제”

(시사저널=정윤성 기자)

정부가 최대 290만 명의 소상공인에 대한 신용회복을 지원하기로 했다. 고금리 고물가로 고통받는 민생을 지원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금융권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다. 부실 채무자에 대한 리스크를 고스란히 떠안아야해서다. 더 나아가 신용체계 왜곡으로 인해 성실 차주들이 오히려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지난 11일 국회에서 열린 서민·소상공인에게 힘이 되는 신용사면 민·당·정 협의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15일 금융위원회는 서민·소상공인 신용회복지원을 위한 금융권 공동협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지난 11일 금융당국과 여당이 지민당정협의회를 열고 자영업자·소상공인의 채무연체자에 대해 연체이력 정보를 삭제해주는 신용회복 계획을 확정한 데 따른 후속 조치다. 2021년 9월부터 올해 1월까지 2000만원 이하 연체자 중 오는 5월까지 연체 금액을 전액 상환하는 이들이 신용사면 대상이다. 

신용평가회사는 대출이나 카드대금을 연체한 기록을 금융회사와 공유하고 있다. 통상 30만원 이상의 금액을 30~90일 가량 연체하면 단기연체, 100만원 이상 금액을 90일 이상 연체하면 장기연체로 분류된다. 이렇게 연체된 개인정보는 금융권에 공유되고 신용점수가 하락해 대출 조건이나 카드 발급 등 금융거래에 불이익을 받게 된다. 연체액을 모두 갚더라도 연체 이력이 바로 삭제되지 않고 최장 5년까지 유지된다. 장기간 금융활동에 제약이 생기는 셈이다. 

정부는 이번 신용사면을 통해 코로나19로 고통받은 소상공인 최대 290만 명이 혜택을 볼 것으로 전망한다. 구체적으로 보면, 연체자 약 250만 명의 신용점수가 평균 39점(662점→701점) 상승해 저금리 대환대출이 가능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15만 명이 신용카드 발급 기준을 충족하는 것을 비롯해 25만 명의 대출 접근성도 향상될 것으로 기대된다.

15일 오전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서민·소상공인 신용회복지원을 위한 금융권 협약식'에서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출 시스템 리스크 번질 수도"…금융권 속앓이

가장 최근의 신용사면은 2021년에 단행된 바 있다. 당시 정부는 코로나19 시기인2021년 8월 취약차주의 신용회복을 위해 신용사면을 했었다. 2020년 1월부터 2021년 8월까지 20개월 동안 2000만원 이내 연체자 250만 명이 대상이었다. 

한국신용정보원에 따르면, 당시 차주 약 200만 명의 신용점수(NICE 기준)가 평균 34점 상승했다. 또한 차주 12만 명이 신용카드 발급을 위한 최저신용점수(NICE 680점)을 충족하게 됐고, 13만 명이 당시 신규 대출자 평균 신용점수(NICE 866점)을 넘기는 효과를 봤다.

이처럼 이번 신용사면으로 연체자들은 금융거래에 숨통이 트일 전망이지만 금융권에선 불만이 감지된다. 정부 주도의 정책에 따른 리스크를 민간기업인 금융사가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신용이 회복된 연체자들이 다시 대출을 일으키면 부채 관리도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차주들의 신용평가 자체에 혼선이 빚어질 수 있다는 게 금융권의 설명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일단 신용점수가 일괄적으로 상승하면 잠재 리스크 대상이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며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그러면서 "다른 경제 상황은 동일한데 신용점수만 올랐다고 차주의 상환 능력까지 오르는 건 아니다"라며 "그렇게 되면 그 간극에서 발생하는 리스크가 금융사 몫이 되지 않겠나"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사면으로 인한 신용점수 상승이 지속될수록 금융권은 부실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대출 심사를 강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또 다른 은행권 관계자는 "결국 금융회사는 발생하는 리스크에 대응하고 그를 피해 가야하기 때문에 대출 심사 자체가 깐깐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예를 들어 신용 평가 항목이 늘어난다거나 기준이 강화된다든지 하면, 그에 대한 피해는 다른 성실 차주 등이 입게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 재래시장에서 시민들이 물건을 고르고 있다. ⓒ연합뉴스

반복되는 역차별 논란…"전체 금융 소비자들까지 피해 입을 것"

이 같은 지적은 과거 정부 정책에서도 계속돼 왔다. 앞서 2007년 '720만 명 신용대사면' 공약을 내걸었던 이명박 정부는 출범 직후 도덕적 해이 논란과 함께 72만 명만 지원하는 것으로 정책을 변경한 바 있다. 2013년 박근혜 정부 당시와 2021년 문재인 정부 당시에도 취약계층에 대한 신용사면 시행이 예고되자 성실 차주들의 반발이 잇따랐다.

정부는 이에 대해 우려가 지나치다는 입장이다. 이날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코로나19 여파와 함께 이례적인 고금리·고물가의 지속 등 예외적인 경제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연체돼 금융거래에 어려움을 겪는 취약계층이 현재 290만 명이 넘는다"면서 "개인적 사정 외에 비정상적인 외부환경 때문에 연체에 빠진 분들에게 우리 사회가 재기의 기회를 드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면 전문가는 금융권의 신뢰 근간이 훼손될 것이라 우려한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신용점수는 말 그대로 대출한도나 가산금리, 신용카드 발급 등의 기본이 되는 매우 중요한 정보인데, 이를 일괄적으로 지우는 것은 금융체계의 근간을 훼손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또한 "사면을 통해 저신용자들의 대출이 가능해지겠지만, 이들의 재연체로 인해 연체율이 오르면 금융기관은 부실대출을 줄이기 위해 대출한도나 가산금리를 조정할 수밖에 없다"며 "결국 다른 금융 소비자 전체가 피해를 입게 된다"고 설명했다.

석 교수는 그러면서 "소상공인 지원 정책의 핵심을 신용 점수로 하는 접근 방식부터 문제"라며 "현행 신용회복제도 내에서 대출 만기 연장이나 폐업 지원 등 전방위적인 대책을 강구할 때"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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