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병존(竝存)

2024. 1. 15.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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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모임에 갔다.

마침 여러 소송에 휘말린 대학 교수에게 "거기 갈등이 심하다면서요?"라고 물었다.

사전적으로 갈등은 당사자들 사이에 목표나 이해가 양립할 수 없거나 대립할 때 발생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갈등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흔히 하지만 갈등에 순기능이 없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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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모임에 갔다. 마침 여러 소송에 휘말린 대학 교수에게 "거기 갈등이 심하다면서요?"라고 물었다. 그는 "안 시끄러운 대학도 있나요?"라고 답했다. 나는 그때 그가 똑똑한 것을 처음 알았다. 사전적으로 갈등은 당사자들 사이에 목표나 이해가 양립할 수 없거나 대립할 때 발생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갈등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흔히 하지만 갈등에 순기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갈등은 변화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변화를 원하는 사람은 갈등을 비켜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때로는 갈등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리려 한다.

갈등이 발생하는 원인은 다양하다. 개인 수준에서 국제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가치, 이해관계, 제도, 이념, 자원 등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나고, 우리는 2024년도 결코 편안한 한 해가 되리라고 쉽게 안심하지 않는다. 올 한 해도 갈등을 관리하려는 시도, 해결하려는 노력, 갈등을 전환하여 더 큰 동력을 얻으려는 지혜가 간절히 필요할 것이다. 소박한 소망을 빌어보자면 갈등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파괴적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무것도 해결되거나 해소되지 않는다 해도 파괴적 결과, 곧 파국으로 치닫지 않기를 말이다.

1994년 12월 30일 아침 존 샐비(John C. Salvi Ⅲ)라는 한 청년이 매사추세츠 브루클린에서 총기를 발사하여 두 명이 사망하고 다섯 명이 크게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반낙태주의자였다. 이를 영어로 하면 pro-life인데, 그 문자적 뜻은 '생명 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낙태를 하고 있다고 여긴 병원에 들이닥쳐 총을 난사한 것이다. 그는 결국 가석방 없는 종신형에 처해졌는데, 불행히도 1996년 감옥에서 자살을 하고 말았다. 아이러니다. '생명 지지'의 가치를 주장하다가 자신 및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죽인 것이다.

충격적인 이 사건 이후 지역에서 낙태선택권(pro-choice)을 지지하는 대표자와 낙태 반대를 주장하는 대표자 세 명씩 여섯 명이 모여 몇 달에 걸쳐 비밀리에 토론을 하였다. 이 토론 결과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긴 토론에도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도리어 의견은 더 양극화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완전하지 않고, 이 주제가 처음에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고 자기주장에도 모순점이 있다는 것 역시 발견했다. 또 도덕적·이념적 차이는 분명하지만 서로를 향해서 친밀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각 진영의 대표자들은 자신의 생각이 더 옳다고 여전히 주장했지만, 상대편에게 친절해졌고 서로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기도 했다. 나는 이를 병존(竝存)이라고 표현한다. 공존은 서로를 돕는다는 의미가 은근슬쩍 있다면, 병존은 '나와 다른 너도 거기에 있다'를 인정하는 것이다.

서로 함께 잘 살기를 기획하는 공존이 어렵다고 해서 '병존'이 안된다고 여길 이유도 필요도 없다. '나와 다른 너도 거기 있으려면 있어라'를 행하지 못하면, 샐비의 비극적이고 파괴적인 아이러니가 언제든 다시 일어날 것이다. 병존은 민주주의의 윤리다.

[김학철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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