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우리말 현주소 보여준 '열상-자상' 논란
새해 벽두에 터진 제1야당 대표 피습사건으로 정치권 분열이 심해지고 있다. 언론이 시시각각 전하는 수많은 ‘말’ 가운데 ‘열상’과 ‘자상’은 주목할 만하다. 우리말 속살 한 지점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건 초기 소방청에서 “1.5cm 열상을 입었다”라고 발표한 데서 비롯한 ‘열상-자상’ 논란은 한동안 지속됐다. 언론들도 두 말을 뒤섞어 쓰는 등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이는 우리말 이해가 부족한 데에 따른 자가당착적 오류에 지니지 않는다.
‘열상’은 찢긴 상처, ‘자상’은 찔린 상처
‘열상(裂傷)’은 피부가 찢어져서 생긴 상처를 말한다. ‘찢을 열, 상처 상’ 자다. 열상이라 하면 ‘더울 열(熱)’ 자를 쓴 ‘열상(熱傷)’을 먼저 떠올리기 쉽다. 일상의 말로는 이게 더 가깝다. 이는 뜨거운 것에 데여 생기는 피부의 손상, 즉 ‘화상(火傷)’과 같은 말이다. 이번에 논란이 된 ‘열상’과는 형태만 같을 뿐 전혀 다른 말이다.
‘자상(刺傷)’은 칼 따위의 날카로운 것에 찔려서 입은 상처를 말한다. ‘찌를 자(刺)’ 자다. ‘자(, 나무에 가시가 있는 모양)’에 ‘칼 도(刀)’가 결합해 ‘찔러 죽이다, 찌르다’란 뜻을 나타낸다. 사람을 몰래 죽이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자객(刺客)’이란 말에 이 글자가 쓰였다. 그래서 사건 초기에 ‘칼에 찔렸다’고 보도할 때 ‘자상’이란 표현이 나왔어야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소방청에선 어찌 된 일인지 ‘열상’으로 기록했고, 이를 그대로 받아쓴 언론 역시 본의 아니게 ‘우리말 무지’를 드러낸 셈이다. ‘열상’과 ‘자상’ 논란은 말 자체도 어렵긴 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우리말을 얼마나 소홀히 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두 단어는 한자를 바탕으로 이뤄진 한자어다. 우리말의 한 축이긴 하지만 잘 쓰지 않는 말이다. 그보단 ‘찢긴 상처’나 ‘찔린 상처’라고 하는 게 일상의 소통에선 쉽고 편하다.
‘자(刺)’ 자가 어렵다 보니 우리말 역사의 한 시절에 다른 글자 대신 쓰인 사건이 있었다. 본래 글자는 ‘랄(剌)’이었는데, 한자 형태가 비슷한 데서 온 착각의 결과였다. ‘묶을 속(束)’과 ‘칼 도(刀)’가 결합한 ‘랄(剌)’은 흔히 “재기 발랄(潑剌)하다”라고 할 때 그 쓰임새가 보인다. 우리말에서는 이 외에 일상어에 쓰인 ‘랄’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한자다.
콜레라를 ‘호열랄-호열자’로 옮겨
100여 년 전 이 땅을 공포로 몰아넣은 치명적 질병 중 하나는 ‘콜레라’였다. 의료와 위생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낙후된 시절이었다. 당시 이 병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범 호(虎)’ 자를 써서 ‘호역(虎疫)’ 또는 ‘호환(虎患)’이라 하기도 했다. 함께 불린 별칭이 ‘호열자(虎列刺)’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 신문을 보면 고레라, 호열자, 호열랄 같은 말이 섞여 나온다.
그런데 ‘콜레라’와 ‘호열자’는 발음이 많이 달라 어떻게 같은 말로 쓰였는지 의아스럽다. 이 말이 일본을 거쳐 들어오면서 글자가 잘못 전해졌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애초 일본에서 콜레라를 음역해 ‘虎列剌’로 적고 [코레라(コレラ)]로 읽었다. 이것을 우리 한자음으로 읽으면 ‘호열랄’이다. 이게 우리나라로 넘어오면서 ‘랄(剌)’을 모양이 비슷한 ‘자(刺)’로 잘못 읽어 ‘호열자’로 알려졌다. 1920~1930년대 신문은 호열랄과 호열자가 함께 쓰인 것을 보여준다. 다만 당시 ‘호열자’보다 ‘호열랄’ 빈도가 더 많았음에도, 이후 말이 ‘호열자’로 수렴돼간 것은 의아한 일이다. ‘랄(剌)’ 자가 잘 쓰이지 않는 글자인 데다, 의미적으로도 치명적 질병을 나타내기엔 ‘자(刺)’ 자가 더 적합한 데가 있다는 점에서 그리됐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거나 초기에 호열랄과 호열자가 혼용되던 두 말은 점차 호열자로 굳어지면서 호열랄은 사라졌다. 1957년 완간된 <조선말 큰사전>(한글학회 펴냄)에 이미 호열랄은 없고 ‘호열자(虎列刺)’가 콜레라를 뜻하는 말로 올랐다. 이런 오역(誤譯)의 역사는 우리말에 깊이 뿌리를 내려 지금도 국어사전에 ‘호열자’가 콜레라의 음역어로 실려 있다. 물론 이 역시 지금은 화석처럼 사전에만 남아 있을 뿐, 점차 사라져가는 말이다. 굳이 음역어를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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