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고금리 후폭풍…위기의 한국 기업

장규호 2024. 1. 15.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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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그래픽=이은현 한국경제신문 기자


부동산 개발 사업의 부실로 자금난에 몰린 태영그룹이 기업구조개선작업(워크아웃)을 전격 신청하면서 계열 방송사 SBS의 경영권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가 하면, 자구 노력의 진정성을 둘러싸고 채권단과 태영 오너 측 간 갈등도 깊어졌습니다. 우리나라 경제에 태풍과도 같은 위기가 몰려오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연초부터 생깁니다.

여러분이 방학을 유익하게 잘 보내면 다음 학기를 자신감 있게 시작할 수 있듯이 나라 경제와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기가 좋을 때 부실하고 허약한 부분을 정리·수습하고 내실을 다지는 노력을 기울여야 다가올 불황을 이겨낼 힘을 축적할 수 있습니다. 금융회사들이 비 올 때(기업이 어려울 때) 우산(대출 등)을 뺏어선 안 된다는 얘기도 있지만, 부실 문제의 일차적 책임은 기업과 가계 쪽에 있지요. 국민경제의 안정을 고려해서라도 ‘밑 빠진 독’ 신세의 기업이나 개인을 계속 지원할 순 없습니다.

태영그룹의 경영난은 최근 1년 반 사이 진행된 전 세계적 고금리 금융긴축이 원인입니다. 국내 부동산 개발 사업에 돈을 대는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잔액만 134조 원에 이르고, 이 중 상당액이 채권 회수가 불투명한 부실 대출일 수 있습니다. 이번 사태가 금융시장 불안을 키우게 놔둬선 안 될 겁니다. 과거 부실기업 구조조정은 어떻게 진행됐고, 이번 위기의 원인은 무엇인지, 기업 부실은 어떤 치유 과정을 거치는지 4·5면에서 살펴봤습니다.

타이밍 놓친 조선 구조조정에 20조 허비
기업 부실 정리 미루면 나중엔 더 큰 부담

Getty Image Bank


경제위기 발발과 기업 부실 문제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경제위기는 호황 때 방만하게 늘어난 돈이나 헤픈 정부 지출, 부채로 쌓아 올린 경제가 지속되지 못하고 경기하강 충격이 시작될 때 엄습하는데요, 부실기업은 이런 위기를 더 키우는 골칫덩이입니다. 과도한 빚을 끌어 쓰다 부실 덩어리로 전락한 기업의 구조조정을 잘해야 다른 기업으로 신용위기가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과거 경제위기 때 한국 기업의 구조조정은 어땠는지 살펴볼까요?

‘대마불사’ 등 숱한 논란 낳아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지경까지 간 우리나라의 외환위기는 기업의 문어발식 확장과 무리한 외부 차입에도 원인이 있었습니다. 기업을 경영할 때 자기 돈(자기자본)과 빌린 돈(타인자본) 간 황금비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업이 제품을 잘 팔고 돈을 잘 벌면 금융회사는 먼저 나서서 돈을 빌려주려 하겠지요. 그런데 이런 기업의 확장세가 이어지지 못하고 부진한 실적을 보이기 시작하면 그제야 기업이 쌓아 올린 빚 규모를 따지기 시작합니다. “물(유동성)이 빠지면 누가 벌거벗고 수영하는지 알 수 있다”고 한 투자의 대가 워런 버핏의 말이 딱 맞습니다.

당시 우리 정부는 ‘제2의 IMF 위기’를 막아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동차, 반도체 등의 중복투자를 막고 핵심 사업 부문을 집중 육성하겠다며 현대·LG·대우·삼성·SK 등 5대 그룹을 모아 이른바 ‘빅딜(big deal)’을 추진했죠. 산업 구조조정의 형식을 빌린 정부 주도의 이런 결정은 일부 기업엔 탄탄한 성장 기반을 마련해줬습니다. 그러나 LG그룹은 반도체 사업에서 아쉬움을 남기며 손을 떼야 했고, 대우는 삼성자동차 인수 실패로 그룹이 해체되는 계기를 맞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이후 이어진 세계적 경기침체는 조선업과 해운업에 일대 위기를 몰고 옵니다. 조선업은 2006~2008년 호황기를 맞았는데요, ‘세계 1위’에 자신만만하던 한국 조선회사들이 이를 구조조정의 좋은 기회로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2015년 뒤늦게 조선업 구조조정이 시작되면서 STX조선해양, 성동조선해양 등이 법정관리에 들어가고 맙니다. 당시 대우조선을 포함해 조선업에 공적자금 등 20조 원 넘는 돈이 투입됐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돼버렸어요.

해운업도 비슷했습니다. 2011년부터 세계 해운 물동량이 급감하고 선박은 초과 공급된 상태에서 경영 위기를 맞았죠. 국내 1위, 세계 7위의 국적 선사 한진해운은 결국 법정관리로 가고 파산하고 맙니다. 대우조선은 살려놓고 한진해운은 파산하게 둔 정부의 기업 구조조정에 대한 비판도 많았습니다. 정부는 덩치가 큰 기업은 죽지 않는다는 ‘대마불사(大馬不死)’에 대한 믿음을 민간에서 불식시키려 했겠지만, 한국 해운업의 경쟁력 약화를 불러오고 맙니다.

돈 풀어 막은 위기, 두고두고 문제

이번에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엄청나게 풀린 돈이 문제입니다. 그 과정을 잠깐 볼까요?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세계화와 각국의 금융자유화, 중국 경제의 부상으로 전 세계적으로 저축량이 급팽창합니다. 소비를 하고도 돈이 많이 남으니 금리는 장기간 아주 낮은 상태에 머물렀습니다. 이게 무분별한 투자로 이어지며 주기적으로 붐과 위기를 되풀이(붐&버스트)하고 있어요. 2008년 금융위기가 첫 사례입니다. 이를 극복하려고 나온 제로금리, 양적완화가 다시 저축을 늘리고 자산 거품을 키우는 악순환이 이어졌죠.

여기에 코로나19 위기를 이겨내려고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이 어마어마한 규모로 돈 풀기 경쟁을 합니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보유한 자산 규모가 금융위기 이후 작년까지 15년간 9000억 달러에서 8조5000억 달러로 여덟 배 이상 늘어났어요. 그만큼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렸다는 얘기고, 이게 인플레이션을 불러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코로나19 팬데믹에 기업 대출 만기를 계속 연장해주며 위기를 뒤로 미뤄오다 결국 레고랜드 사태에 이어 부동산 개발 사업에서 부실 덩어리가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죠. 금융긴축에 따른 발작과 같은 경제 충격이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NIE 포인트

1.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인에 대해 알아보자.

2. 한국 기업 구조조정의 성공, 실패 사례를 파악해보자.

3. 금융긴축에 따른 최근 경제적 어려움에 대해 토론해보자.

기업도 건강 나빠지면 병원 찾아야죠
치료법은 자율협약·워크아웃·법정관리

김주현 금융위원장(왼쪽에서 두 번째)이 지난 12월 28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태영건설 워크아웃 신청과 관련한 대응방안을 설명하고 있다. 임대철 한국경제신문 기자


기업도 부실해지면 사람처럼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채권은행이 기업에 빌려준 자금의 만기를 연장해주고, 금리를 내리며, 빚을 일부 탕감해주는 것은 물론, 새로 경영자금을 수혈하거나 대출을 주식으로 출자전환하는 식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사업 부문을 개편하고 재무구조를 개선하며 소유·지배구조를 조정하는 모든 활동을 기업 구조조정(corporate restructuring)이라고 합니다.

부실 정도에 따라 구조조정 방법 다양

과거엔 정부가 산업 합리화 조치 등을 바탕으로 직접 부실 산업과 기업을 고르고 ‘존속이냐 퇴출이냐’를 결정했죠. 외환위기를 겪고 기업 구조조정의 중요성을 깨달으며 법률과 제도를 속속 정비하기에 이릅니다. 지금은 기업에 자금을 빌려준 채권은행들이 기업 구조조정을 주도합니다.

주채권은행은 기업이 일시적 자금난을 겪는 건지, 구조적 문제로 사업 구조조정이 필요한지를 먼저 판단하고 처방을 내립니다. 부실 정도가 심하지 않다면 대표적으로 재무구조 개선약정을 맺습니다. 감기약 정도의 처방이죠. 그렇지 않고 부실이 어느 정도 진행됐다면 △자율협약 △기업구조개선작업(워크아웃) △사모펀드(PEF)에 채권 매각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 등을 대안으로 검토합니다.

자율협약은 일시적으로 돈이 모자란 기업이 비핵심 자산 매각, 비용 절감을 약속하고 은행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는 겁니다. 문제는 법적 근거가 없어 강제력 또한 없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구조조정이 시간만 끌 수 있고, 실패할 경우 책임 소재를 따지기도 어렵습니다. 기업 입장에선 이미지 훼손 우려가 적어 자율협약을 선호합니다. 하지만 STX조선이 자율협약에서 4조5000억 원의 자금 지원을 받고도 결국 법정관리로 넘어간 사례처럼 제도 운영의 문제가 적지 않습니다.

워크아웃은 살아날 가능성이 있는 부실 징후 기업이 대상입니다. 자율협약과 내용 면에선 비슷한데요, 기업구조조정촉진법에 따라 진행되는 게 차이점입니다. 그런데 워크아웃을 잘 마치고 다시 건강한 기업으로 거듭난 사례가 갈수록 적어지고 있습니다. 2000년에 워크아웃에 들어간 기업들은 100% 졸업(워크아웃 성공)한 데 반해, 2015년 이후로는 졸업 비율이 10~30%대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정부는 자본시장을 통한 구조조정 방식도 새로 도입했습니다. 즉 PEF가 채권은행으로부터 구조조정 기업의 채권을 매입해 사업 구조조정을 주도하는 것이죠. PEF는 해당 업종의 최고 경영전문가를 영입해 기업 부실을 해결하려 하고 인수합병(M&A)을 적극 시도하는 등 구조조정을 더 충실하게 할 가능성이 큽니다.

마지막으로 회생 가능성이 없는 부실기업은 법원에 넘겨져 회생절차를 밟습니다. 최근엔 법정관리로 들어가기 직전, 채권단이 M&A를 추진해 매수자를 정하고 이를 법원이 승인하면 법정관리를 졸업시켜주는 새로운 제도(Pre-packaged Plan)도 새로 선보였습니다. 워크아웃과 법정관리의 장점을 결합한 겁니다.

민간 창의·효율성 실질적으로 높여야

이런 새로운 제도들은 민간의 창의성과 효율성을 활용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러나 자본시장을 통한 구조조정을 활성화하기 위해 기업구조조정펀드를 조성하더라도 주된 출자자는 산업은행 같은 정책금융기관이 맡게 됩니다. 기업 구조조정이 민간 자율로 이뤄진다고 해도 정부의 입김이 많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 거죠. 이런 점 때문에 관치금융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비판도 많습니다.

산업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산성이 낮거나 발전 가능성이 적은 산업에서 생산성이 높고 발전 가능성이 있는 산업으로 생산요소를 이동시키는 산업 구조조정은 필요합니다. 그에 따른 기업 구조조정은 불가피하죠. 그러나 대규모 공적자금 투입과 국책은행의 출자전환을 통한 공기업화, 특혜 시비 등 정부 개입에 따른 부작용은 곰곰이 따져봐야 합니다. 민간이 어떤 선택을 하든 기업 구조조정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제도와 관행이 잘 정착돼야 할 것입니다.

NIE 포인트

1. 외환위기가 기업 구조조정의 중요한 계기가 된 이유를 알아보자.

2. 구조조정 제도별로 장단점이 무엇인지 파악해보자.

3. 산업 구조조정과 기업 구조조정의 차이를 알아보자.

장규호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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