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쌓이는’ 난임휴가제···인사담당자도 “그런 제도가 있었나요”
9개 제도 중 4개서 "모른다" 30%
일부 항목서는 40%대 넘어 '심각'
일반 근로자 '대책 미인지' 더 높아
낮은 인지도→활용도 하락 '악순환'
"기존정책도 활용 못한채 새 정책 요구"
정부가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기업체 인사 담당자마저 모를 정도로 일선 현장에서는 겉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존 제도와 정책도 국민에게 효과적으로 홍보하고 시행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판기’처럼 추가 대책만 더 늘리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 아닌지 우려를 키운다.
15일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12월 말 공개한 ‘2022년 일·가정 양립 실태 조사’에 따르면 일·가정 양립을 도울 주요 제도 9개 중 4개에 대해 ‘제도를 모른다’는 답변이 30%를 넘었다. 이 가운데 3개에 대해 ‘모른다’는 답변율은 40%대에 달했다. 이 조사는 상시근로자 5인 이상 사업체 5038곳의 인사 담당자를 대상으로 실시했다. 실무 담당자인 인사 담당자가 이런 상황이라면 일반 근로자와 국민의 제도 인지도는 더 낮고 활용도 저조할 수밖에 없다.
실제 제도의 낮은 인지도는 낮은 활용 실적으로 이어졌다. 이번 조사에서 ‘42.7%가 모른다’고 답한 가족돌봄휴가제는 가족을 돌봐야 하는 근로자에게 최대 10일의 무급 휴가를 부여하는 제도다. 하지만 2022년 사용 실적은 5%에 그쳤다. 2020년과 2021년에도 각각 6.2%, 5.5%에 머물렀다. ‘41.4%만 알고 있다’고 답한 난임치료휴가제도 2022년 사용 실적이 4.3%로 6년째 5%를 넘지 못하고 있다. ‘46%가 모른다’고 답한 가족돌봄 등을 위한 근로시간단축제 또한 2020년 사용 실적이 4.7%에 그쳤다. 이 제도는 사용 실적이 2021년 7.8%에서 1년 만에 크게 뒷걸음질쳤다.
조사 결과는 제도와 정책은 현장 수용성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도입하더라도 근로자가 일터에서 마음껏 제도를 사용할 수 없는 인력 구조와 사내 문화가 낮은 사용 실적의 원인으로 지적됐기 때문이다. 제도 별로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를 묻자 ‘동료와 관리자의 업무 가중’ ‘사용할 수 없는 직장 문화’가 고르게 답변 상위권에 올랐다. 우려되는 것은 사업장 규모가 작을수록 이런 경향이 더 심하다는 점이다. 이번 실태 조사를 진행한 한 관계자는 “대체 인력 지원, 육아휴직 지원금 등 사업주 대상 정책에 대한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낮다”며 “사업주 대상 홍보를 늘리는 식으로 제도 이용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부는 저출산 문제를 우리 사회의 위기 중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저출산 해결을 위해 15년간 약 280조 원 규모의 예산을 투입했다. 하지만 2020년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낳을 수 있는 평균 자녀 수)은 0.78명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은 최근 저출산 문제에 대해 고용·주거·양육·경쟁으로 인한 불안이 원인이라고 진단하면서 사회구조 전체의 변화를 주문했다. 그동안 다양한 저출산 대책 아이디어를 낸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이달 중 일·가정 양립 대책을 발표할 방침이다.
하지만 정부 내에서는 정책 전반의 메커니즘이 변화하지 않고는 ‘한국은행의 조언’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책의 기본 단위인 지원 사업에 대한 정부 자체 평가 기준은 국민 인지도보다 1년 단위로 정해지는 실제 사업 참여율(예산 집행률)이다. 정부 입장에서는 지원 사업이 다른 정책이나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관가에서는 기존 사업을 운영하는 것보다 비슷한 성격의 신규 사업을 마련하는 게 예산 확보가 더 쉽다는 말이 나온 지 오래다. 이런 상황은 기존 제도와 정책이 개선되지 않은 채 쌓여가는 악순환을 낳는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의 한 관계자는 “정부 사업 인지도의 중요성은 이해하지만 당장 참여 실적이 낮으면 내년도 평가에서 없어질 수 있는 상황이 반복된다”며 “기존 제도와 정책이 안착될 충분한 기간이 주어지거나 개선되지 않고 정부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대책을 계속 요구 받고 있다”고 말했다.
세종=양종곤 기자 ggm11@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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