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 대들보’ 포닥 내보내야 하나…예산삭감에 얼어붙은 연구현장
연초부터 연구자별 삭감된 예산 통보
“R&D 경쟁력 저하 불가피…현실 모르는 정책”
일방적으로 삭감되니 모든 연구자들이 너무 힘들 겁니다. 지금 연구실에 있는 연구원부터 내보내고 있습니다. 포닥(박사후연구원)은 인건비가 적지 않아서 부담이 더 큽니다. 장기적으로 같이 일하려고 했는데, 빨리 기업이나 해외로 일자리를 찾아보는 게 좋겠다고 해서 다들 알아보는 중입니다. 5명 중 3명은 떠나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연구실에 채용하려던 해외 연구자들에게도 연구비가 불확실해서 앞으로 몇 년은 채용이 어렵다고 통보했습니다.
국내 과학기술특성화대의 한 교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의 삭풍이 연구 현장을 덮치고 있다. 주무 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세계 최고’, ‘혁신’, ‘도약’ 같은 긍정적인 단어의 보도자료를 내고 있다. 하지만 연초부터 과제별 예산 삭감 명세서를 받은 연구자들은 망연자실한 모습이다.
올해 R&D 예산은 26조5000억원으로 지난해 31조1000억원보다 15% 가량 줄었다. 정부 R&D 예산 삭감이 이뤄진 것은 33년 만이다. R&D 예산은 1991년 이후 6개 정권이 지나오면서도 한 번도 삭감된 적이 없다.
한국연구재단은 최근 대학 산학협력단과 개인 연구자에게 올해 연구비 감액 조정에 따른 과제 협약 변경 사항을 안내하며 삭감된 예산을 통보했다. 연구마다 목표와 성과가 제각각이지만 개인 기초연구 중 우수연구는 10%, 생애기본연구는 20%가 일괄적으로 삭감된 것으로 전해진다.
다른 사업들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가 주관하는 창의형 융합연구사업은 전체 예산이 반토막났다. 23개 연구과제의 지원금도 덩달아 반토막이 불가피하다. 과기연구회는 최근 연구자들에게 지원금 조정안을 통보했는데, 지난해 선정된 7개 과제의 경우 올해 예정된 14억원의 지원금이 일률적으로 7억6000만원으로 줄었다. 산업통상자원부를 비롯해 개별 부처가 지원하는 연구과제는 삭감폭이 더 크다는 게 현장의 설명이다.
물론 R&D 분야가 모두 삭감된 것은 아니다. 반도체와 이차전지를 포함해 일부 첨단전략산업과 경제안보 필수 기술 관련 R&D 예산은 증액됐다. 하지만 조선비즈가 만난 현장 연구자 가운데 ‘혁신’이나 ‘도약’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정부의 국가 연구경쟁력 유지의 핵심 축이자 과학기술 인재 배출을 맡고 있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와 광주과학기술원, 울산과학기술원(UNIST),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등 4대 과학기술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한 과학기술원 교수는 “과제 2개를 맡고 있는데 최소 30% 정도 감액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같이 일하던 사람을 내보내면 새 사람을 뽑는 것도 몇 년 뒤에나 가능할텐데, 내년에 연구비가 원상복구되더라도 후유증이 5년은 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연구비가 80%까지 감액된 동료 교수들이 있는 걸로 아는데 학생들 인건비를 주기 위해 대출을 알아보러 다니고 있다”며 “새로운 연구 주제 발굴도 어려워질뿐 아니라 이런 상황에선 능력이 좋은 연구자가 가장 먼저 해외로 나가기 마련인데, 결과적으로 한국 과학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이 클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 다른 과기원 교수는 “10~25%면 많이 줄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인건비는 건드릴 수가 없다보니 시약이나 재료 사는 돈을 줄여야 하는데 이 돈이 30~50%는 줄어드는 것”이라며 “연구할 돈, 실험에 쓸 돈은 크게 줄어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개인 과제는 10%, 집단연구과제는 25% 삭감을 통보받았다”며 “IMF때도 현상 유지는 해줬는데 모두들 폭탄 맞은 것 같다는 말을 한다”고 털어놨다.
교수 임용된 지 얼마 안 된 젊은 연구자들은 이미 연구실을 마련하고 운영하는 노하우가 있는 원로와 중견 교수들보다 충격이 커보인다. 정부는 R&D 제도 개편을 하면서 젊은 연구자들에게 지원을 몰아주겠다고 했지만, 현장에선 그런 분위기는 느끼기 힘들어 보인다.
과기정통부는 기초연구 사업의 올해 신규과제 수와 연구비를 최대 2배로 확대했다며 젊은 연구자에 대한 지원을 늘렸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올해 신규 과제수는 400개에서 759개로 늘었고, 연구비 단가는 최대 1억5000만원에서 3억원으로 늘었다. 또 세종과학펠로우십 지원을 전년대비 2배 이상 증액(1299억원)했다.
하지만 올해가 아닌 작년에 기초연구 사업에 선정된 연구자는 연구비가 늘기는 커녕 오히려 줄었다. 개인 과제인 기초연구의 경우 ‘우수연구’는 10% 일괄 삭감, ‘생애기본연구’는 20% 일괄 삭감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수연구’는 글로벌 리더연구와 중견연구, 우수신진연구, 세종과학펠로우십 등이 포함됐고, ‘생애기본연구’는 기본연구와 생애첫연구 등이 포함됐다. 같은 젊은 연구자인데 작년에 뽑힌 연구자는 연구비를 깎고, 올해 뽑힌 연구자는 연구비를 늘려주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수도권의 한 대학의 임용 2년차 신임교원은 “예전에 있던 생애첫연구처럼 연구실 첫 세팅하는데 필요한 과제가 다 사라지고, 우수신진연구에만 지원을 늘렸다”며 “우수신진연구 과제는 유학 후 한국에 갓 들어온 연구자보다는 5~7년 정도 연구를 한 사람들을 위한 과제이다보니 진짜 젊은 연구자에게 돌아올 파이가 사실상 없다”고 말했다.
지방거점국립대의 신규임용 교수도 비슷한 지적을 내놨다. 이 교수는 “우수신진연구 과제 말고는 넣을 수 있는 과제가 없어 일주일째 제안서를 쓰고 있는데, 예전에는 여러 과제에 분산된 연구자들이 모두 여기에만 몰리고 있어 최악의 경쟁률을 기록할 것 같다”며 “정부출연연구기관에서 받은 위탁과제 예산이 35% 깎여 연구실 유지를 위해서는 어떻게든 이들 과제를 따야하는데 걱정이 많다”고 말했다.
과기정통부는 기초연구 예산 삭감 폭을 최소한으로 줄였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R&D사업을 하는 다른 부처의 연구 과제는 삭감 폭이 적게는 30%, 많게는 80%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과기정통부가 아무리 R&D 제도 개편의 순기능을 이야기해도 현장에서는 먹히지 않는 이유다.
서울의 한 사립대 생명공학과 교수는 “일부 부처 과제들은 예산이 30~40% 삭감됐다”며 “연구활동이나 학생 육성 모두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과제는 협약을 한 채로 진행하는데 이걸 제대로 된 안내나 평가도 없이 일괄 삭감한다면 추후 법적으로 문제가 될 것으로 본다”며 “정권이 연구자들을 우습게 보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고 했다.
이 교수는 “연구라는 열차는 1년을 멈추면 다시 바로 출발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속도를 내는 데 2배, 3배의 노력이 필요하다”며 “연구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시스템을 모르는 상태에서 정책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의 한 선임연구원은 답답함을 호소했다. 일부 출연연들은 연구과제중심제도(PBS) 사업 비율이 높아 다른 부처 사업 과제들을 수행하는 일이 많다. 이 연구원은 “산업부에서 받은 과제 중에 아직 기업과 연구가 한창인데 예산 80%가 삭감된 경우가 있다”며 “정부에선 예산이 많이 삭감된 경우 과제 중단을 하고 신규 과제에 지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고 하는데, 기업과 함께 개발하는 과제는 중단이 불가능해서 어떻게든 모자란 연구비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산업부 과제가 90% 가까이 삭감되는 경우도 있다는 증언도 나왔다. 서울 시내 한 대학의 화학공학과 교수는 “내가 맡고 있는 과제는 25% 삭감이 됐는데, 문제를 제기하려고 하니 주변에서 25%는 선방한 거라서 이의제기도 안 받아줄 거라고 했다”며 “재료비와 인건비를 줄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부의 일방적 R&D 예산 삭감에 반대 목소리를 내온 천승현 세종대 물리천문학과 교수는 “주변에는 인건비를 줬더니 재료비가 하나도 안 남았다는 연구자들도 있다”며 “연구 과제에 대해 이달 중에 연차보고서를 내고 다음달에 협약을 한다는데, 급한 사람들은 하라는 대로 협약을 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게 정말 합법적인 것인지 따져볼 것”이라고 말했다. 천 교수는 “연구자들이 연구를 못 하고 법적인 부분에 골몰해야 한다는 게 참담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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