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재벌·언론의 ‘자본파업’”…집권 초 노동계와 ‘신뢰와 긴장’
2003년 8월28일(목) 오후 3~5시 집현실에서 노사관계 개혁 회의가 열렸다. 권기홍 노동부 장관 보고에 이어 경제부총리, 산자부 장관, 국무조정실장 등 경제관료들이 이구동성으로 노조의 과격성을 비판했다. 문재인 민정수석이 노사문제는 제도보다는 파괴적이고 과격한 관행이 문제라고 지적하니 노무현 대통령도 동의했다. 회의에서 노사관계의 너댓개 원칙을 공표하고 세세한 제도개선은 노사정위에 상정해 최종 결정하기로 했다. 회의 끝 무렵 나도 한마디 했다. “이 안은 노동법학자들이 준비한 안이라 법과 제도 중심이고 경제적 측면을 소홀히 하고 있다. 임금인상을 자제시킬 방안, 예를 들어 중앙교섭이나 아일랜드식으로 3년마다 임금협상하는 방안 등이 누락되어 있어 보완돼야 한다.”
9월4일(목) 오전 9시 수석회의에서 노 대통령이 눈에 다래끼가 났다면서 “세종대왕이 눈병이 자주 났다는데, 나도 세종대왕처럼 되려는가 봐요”라고 농담을 했다. 나종일 안보실장이 ‘눈썹을 2~3개 뽑고 더운 수건으로 찜질하는 게 특효’라고 말했다(실제 조금 뒤 노 대통령이 눈썹을 뽑는 걸 본 사람이 있다). 10시 반 노사정위 28차 회의가 열렸다. 노 대통령은 “노동부 개혁안에 노사가 합의 못하면 원안대로 가겠다”고 강경 발언을 했다. 김동완 목사(공익대표)가 대통령에게 민주노총을 만나라고 권유했다. 점심을 먹으며 손길승 전경련 회장이 한국의 임금 수준이 대만의 2배라고 걱정하기에 내가 “네덜란드 모델로 가면 될 텐데 왜 반대합니까?”라고 물었는데 답을 잘 듣지 못했다. 옆에 앉은 김금수 노사정위원장에게 민주노총의 노사정위 참여 설득을 권유하니 “글쎄, 워낙 어려운 문제라서….”라고 말끝을 흐리기에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9월30일(화) 오후 6시 백악실에서, 민주노총 단병호 위원장과 유덕상, 신승철, 이재웅 등 간부들과 김금수 노사정위원장, 박길상 노동부 차관, 문재인 수석, 권재철 노동비서관 등이 만났다. 대통령 인사말에 이어 단병호 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노동계가 처음에는 참여정부에 기대가 컸으나 네이스(NEIS)와 철도개혁을 너무 쉽게 포기해서 아쉽다. 성장과 분배의 균형을 이루고 빈부격차 해소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갑자기 소득 2만불 이야기가 나와 우려스럽다. 노동시간 단축, 비정규직, 연금 문제도 걱정이다. 분배가 악화하고 있다. 디제이(DJ)도 노동자를 이해했지만 결과는 나빴다.” 다른 간부들 성토도 이어졌다. “참여정부는 친노동 정권이 아니라 친자본 정권이다. 부당노동행위가 만연하고 사용자들이 손배, 가압류를 남발한다.” “비정규직이 세계 최다이고. 특수고용관계, 불법파견, 사내하청, 불법하도급이 문제다. 기간제 노동도 너무 많다.” 등등.
노 대통령이 화가 나서 답했다. “민주노총이 노무현 정부와 대화가 안 되면 권영길(민노당 대표) 정부 말고 누구와 대화하겠는가? 맨날 100점 정책을 요구하는 건 무리다. 계란, 토마토가 80g이 안돼도 67g이라고 버릴 수야 없지 않으냐? 우선 경제가 돌아가야 한다. 민노당 정책을 다 받아들이면 경제가 거덜난다. 재벌이 아니라 시장이 문제다. 영혼과 양심을 바쳐 80년대 노동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비록 적장이라도 신뢰를 가지자. 철도노조는 4월에 합의해 놓고 6월에 약속을 어겼다. 노동운동도 자기관리에 철저해야 한다.”
단병호 위원장이 말했다. “현 정부는 진보적이므로 잘하기 바란다. 그러나 섭섭하다. 김금수 노사정위원장을 신뢰하고 존경한다. 위원장 취임 직후 감옥에 면회 와서 만났다. 내가 ‘노무현은 신뢰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대통령은 비판에 너무 민감하지 않으면 좋겠다. 언론에 나가는 대통령 말이 노동자에게는 충격을 준다. 노동문제를 대통령이 언급하지 말고 장관이나 노사정위원장이 언급하는 게 좋겠다.”
다시 노 대통령. “이회창 선거운동하던 사람이 공사 사장으로 그대로 앉아 있고. 원래 김금수 선생을 노동부 장관 시키려 했는데, 경제가 어렵다고 고건 총리가 반대해서 접었다. 진보냐 보수냐 보다 중요한 것은 합리적 대화, 타협의 문화다. 국정원은 이제 노조 감시 않지요? 내가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민주노총은 이기려고 하지 마시라.” 단병호 위원장이 답했다.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고, 안 지려고 할 뿐입니다.” 이렇게 2시간 반 회동이 끝났다.
해가 바뀌어 2004년 5월16일(일) 저녁 7~10시 관저 만찬에 이수호 민주노총 새 위원장, 김대환 노동부 장관과 내가 참석했다. 이 위원장은 보기 드물게 사회적 대화를 공약으로 내걸고 위원장에 당선된 데다 김대환 장관과 대구 계성고 동기라 노사정 대타협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노 대통령이 말을 꺼냈다. “김종인 수석이 80년대 말 재벌개혁한다고 비업무용 부동산 처분을 강요했다. 조순 부총리가 금융실명제 기획단을 만들었다가 반발에 직면해 퇴진했다. 몇차례 개혁을 시도할 때마다 자본파업 기미가 있었다. 개혁은 언제나 재벌, 언론, 관료들과의 투쟁이다. 현재 성장 대 개혁 논쟁도 성격이 비슷하다.”
이수호 위원장이 말했다. “현재 수구진영에서 강철규, 김대환, 이동걸, 이정우 4명을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내가 부연 설명했다. “그때 김종인 수석이 외국 나가 있던 이건희 부회장을 귀국시켜 부동산투기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낭독하게 했기 때문에 재계에서는 모욕감을 느끼고 그 뒤 김종인을 불신하고 싫어합니다.”
노 대통령이 말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가진 자들에게 고통 주겠다’고 큰소리치고는 그 뒤 재벌 20명을 청와대에 불러 각각 독대하고 무너졌다. 어느 책에 ‘포획’(capture) 개념이 나오던데 그야말로 재벌에 포획된 게 아닌가 싶다. 디제이는 아이엠에프(IMF) 힘을 빌려 개혁 각서를 받고 여론몰이식으로 빅딜을 추진했다. 재벌의 정치역학을 언론이 뒷받침해준다. 재벌개혁하면 혹시 외국자본에 인수합병 당해 경영권이 넘어갈까봐 걱정된다.” 내가 말했다. “포획 가설은 정부 규제에 반대하는 시장만능주의 시카고학파의 반규제 논리이고, 외국자본의 위협으로부터 국내 기업의 경영권을 지키는 최선의 방어책은 경영 잘하기와 우리사주제도다.”
노 대통령이 경제를 걱정했다. “아이엠에프 위기 때는 환율이 2배로 뛰어 수출이 늘어난 덕분에 위기를 극복했지만 지금은 소비가 침체되고 뾰족한 분배 대책은 없고, 빚을 내는 것 이외에 방법이 없다. 싱가포르 투자청은 연기금을 세계에 투자하는데 우리는 아직 그런 게 없다. 경제 패러다임이 바뀌었는데 사람들이 아직 잘 모른다.”
이수호 위원장이 말했다. “연기금 투자는 사회적 감시가 필요하고. 재벌 대책은 원칙대로 해야 한다. 시민사회가 지금 노 대통령을 비판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는 신뢰와 기대를 갖고 있다. 그래서 탄핵 때 대통령을 구하러 나섰다. 보수언론과 싸울 자는 결국 노조밖에 없다. 비정규직 해법으로 투명경영과 참여, 고용안정 보장, 임금 인상분을 하청과 비정규직을 위해 사용, 세가지를 약속한다면 조합원들에게 임금인상 자제를 설득하겠다고 말했는데, 언론이 그냥 임금인상 자제라고 보도하는 바람에 내부에서 세게 공격받았다. 노조 내부도 문제가 많고 개혁이 필요하다.”
노 대통령. “너무 조급해하지 않는 게 도와주는 것이다. 노사정 대타협을 달성하고, 분배를 통한 성장을 해서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노사관계 좋은 나라를 모델로 해야 한다.” 이수호 위원장이 “초청해줘 고맙고 기본적으로 신뢰를 갖고 있다”고 작별 인사를 했다. “지금이 고비”라고 힘주어 말한 대통령은 관저 인수문 밖까지 따라 나와 이 위원장을 배웅했다. 처음 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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