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해 밝히는 한국과학]⑤ “한국 기초과학의 인천상륙작전 시작됐다” 가동 앞둔 중이온가속기 라온
세계 최고 수준의 중이온가속기 한국에
세상에 없는 희귀동위원소 찾고, 첨단 반도체 실험도
“고에너지 구간도 확신…시간과 경험의 문제일 뿐”
“한국형 중이온가속기의 밑바탕은 이미 모두 그려졌습니다. 드디어 완성된 저(低)에너지 구간은 2024년부터 본격적인 연구 활동에 들어갈 겁니다. 저에너지 구간에서도 그간 한국 학계의 제약을 넘어설 연구들이 가능하겠지만, 고(高)에너지 구간까지 진행되면 세계를 선도할 연구도 가능해집니다.”
지난달 20일 대전 유성 기초과학연구원(IBS) 중이온가속기연구소에서 만난 ‘라온(RAON)’ 관계자는 길고 거대한 관들 앞에서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중이온가속기 라온은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희귀동위원소를 찾는 장치다. 방사광가속기나 양성자가속기보다 무거운 탄소나 우라늄 원자를 이온으로 만들어 빔으로 쏜 다음 다른 물질과 충돌시켜서 세상에 없는 새로운 원소나 신소재를 찾는 것이다.
두꺼운 콘크리트 벽 뒤로 가니 흡사 암실 같은 기계와 카메라가 보였다. 빛 속도의 18%로 날아온 입자가 다른 입자와 충돌하는 순간과 그 결과를 분석하는 ‘코브라(KoBRA·되튐분광장치)’로 불리는 장치다. 이 관계자는 이번에 완공된 저에너지 구간에 이어 고에너지 구간이 완성되면 무거운 중이온도 광속의 50% 이상까지 가속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라온은 건국 이후 최대의 과학사업이라는 별명이 붙은 대형 프로젝트다. 2011년 세계 최고 성능의 중이온가속기 건설과 운용을 목표로 사업에 착수했고, 모두 1조5183억원이 투입됐다. 하지만 기술 확보의 어려움으로 애초 목표이던 지난 2017년 완공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이후 몇 차례 늦춰져 2021년에야 시설을 완공할 수 있었다. 2022년 10월 첫 빔 인출 시험에 성공한 데 이어 지난해엔 13명의 해외 전문가로 구성한 자문위원회를 출범했다. 올해부터 저에너지 구간에서 본격적인 연구에 나설 예정이다. 첫 삽을 뜬 지 13년 만이다.
과학자들은 지금까지 자연에서 3000개에 이르는 동위원소를 발견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한 동위원소가 그보다 훨씬 많은 7000개에 이를 것으로 과학자들은 보고 있다. 특히 아직 발견되지 않은 동위원소 중에는 희귀암을 고칠 신약 후보물질이나 전자·재료 산업의 판도를 바꿀 신소재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생각이다. 중이온가속기연구소는 라온에서 처음 발견할 희귀동위원소에 ‘코리아늄’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이미 정했다.
라온은 연말연시 들뜬 사회 분위기와 달리 생각보다 조용한 모습이었다. 올해부터 시작한 본격적인 연구를 앞두고 연구 과제를 선정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중이온가속기는 크게 희귀동위원소를 생성하는 장치 ‘사이클로트론’과 이를 가속하는 가속관, 그리고 충돌 실험을 진행하고 분석하는 장치로 나뉘는데 장치 하나하나의 크기가 만만찮게 크다. 극단적인 고온과 절대영도(-273.15도)에 가까운 초저온, 방사선을 차폐하고 중성자를 최대한 분산시킬 공간이 모두 필요하기 때문에 연구소의 전체 면적만 해도 약 1㎞²에 육박한다.
홍승우 초대 중이온가속기연구소 소장은 “138억년전 빅뱅(Big bang)이 발생하고 3분 후 수소와 헬륨으로 구성된 우주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극미량의 리튬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더 이상의 원소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밖의 수많은 원소는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그것이 현재 물리학의 난제”라며 “지금으로선 초신성 폭발이나 중성자별 두 개가 인력(서로 뜰어당기는 힘)으로 합쳐지는 과정에서 폭발이 일어나 만들어졌다고 보는데, 라온은 이런 폭발을 재현해 희귀동위원소를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라온은 아직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국내외 과학계는 물론 산업계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중이온가속기는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공위성이나 우주선에 들어가는 반도체가 우주선(우주 방사선)에 노출되면 고장이 나거나 수명이 단축된다. 이를 지구에서 미리 확인하려면 중이온을 이용한 실험이 필요하다. 자율주행차에 들어가는 반도체도 지표면의 중성자에 영향을 받아 오작동할 수 있다. 중성자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검사를 거쳐야 수출이 가능하다. 현재는 국내 기업들은 해외에서 검사를 받는데 라온이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가면 국내에서 검사가 가능하다.
홍 소장은 “한국에도 중이온과 관련한 고성능 반도체나 방산업계의 수요가 있지만, 제대로 구축한 시설이 없어 불편했다”며 “라온이 정상궤도에 오르면 직접 수익을 창출하진 못하더라도 산업과 기술을 간접적으로 도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물리학계는 국내 기술력으로 만든 중이온가속기 자체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 그동안 해외 연구기관에서 빔타임(Beam time)을 얻어야 실험을 했는데, 이들 기관이 자국 과학자에게 우선해서 배정하다 보니 한국 과학자들은 실험 기회를 얻기가 어려웠다. 시간과 비용을 대폭 아낄 수 있다는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라온이 가동되면 국내 연구자들이 해외로 나갈 필요 없이 주도적으로 실험할 수 있고, 연구를 위해 한국을 찾는 해외 연구자들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홍 소장은 장치 곳곳을 설명하면서 민동필 서울대 물리학과 명예교수가 라온을 ‘한국 기초과학의 인천상륙작전’이라고 언급한 이야기를 소개하기도 했다.
홍 소장은 “기초과학의 후발주자인 한국이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6.25전쟁을 뒤집은 인천상륙작전 같은 담대한 구상이 필요했는데, 라온은 그 구상의 결과물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그는 “잔디 구장이 있다고 무조건 축구 강국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축구 강국이 되려면 잔디 구장이 필요하다”며 “라온은 축구로 따지면 ‘잔디 구장’에 해당하고 한국의 물리학계가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라온이 완성되면서 한국은 핵물리학계에서 가장 높은 레벨에 속하는 워킹그룹9에 당연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됐다. 한국이 전 세계 실험물리학의 리더 자격을 얻은 것이다.
◇”어마어마한 속도전 펼쳐… 올해부터 본격적 연구 시작”
홍 소장은 2022년 7월 중이온가속기연구소 초대 소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그는 그보다 훨씬 전인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기획 단계부터 참여했다. 중이온가속기 구축 계획 수립부터 개념설계까지 도맡았던 총괄 책임자였다. 홍 소장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로 일하면서 중이온가속기와 희귀동위원소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쌓았다.
홍 소장은 “지난해 4월 전 세계 전문가들을 모아 첫 라온 과학자문위원회를 구성했고, 9월에는 국제심포지엄을 열었다”며 “오로지 꿈과 열정, 정신력으로 시작했는데 10여 년 만에 가시적인 결과를 냈다”고 말했다. 그는 “전 세계 학자들이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가속기 구축을 완수한 것에 박수를 보냈다”고 말했다.
-다른 나라에도 중이온가속기가 있다. 라온이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자부하는 이유는.
“세계 최초로 희귀동위원소를 만들어내는 ISOL(대전류 저에너지 동위원소 빔 생성 방법)과 IF(소전류 고에너지 동위원소 빔 생성 방법)를 융합했다. ISOL 방식은 저에너지를 이용한 표적 쪼개짐 방식으로, 원소나 양성자 등 가벼운 이온을 우라늄 같은 무거운 표적 원소에 충돌시켜 많은 양의 희귀동위원소를 만들어낼 수 있다.
IF 방식은 고에너지를 이용한 빔 쪼개짐 방식으로 무거운 이온을 가벼운 표적 원소에 충돌시켜 다양한 희귀동위원소를 만든다. 이 둘은 서로 다른 방식이라 찾을 수 있는 희귀동위원소도 다른데, 라온은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고, 우라늄까지 가속할 수 있는 초전도 가속관의 성능 역시 라온이 미국 에프립(FRIB)에 이어 두 번째다.”
-저에너지 구간 완공 이후 추가적인 성과가 있나.
“지난 2022년 12월 16일에 저에너지 구간의 QWR(4분의 1파형 초전도 가속관) 22개를 가동해 관련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작년 3월 3일에는 한국 최초로 ISOL방식의 사이클로트론을 이용해 나트륨 동위원소의 이온빔을 생성·분리, 온라인으로 인출했다.
같은 해 5월 23일에는 HWR(2분의 1파형 초전도 가속관)까지 모두 102개의 가속관을 모두 통과했다. 저에너지 구간은 완성됐다는 의미다. 이어 6월 1일에는 코브라에서 최초로 빔을 인출해 정상 작동을 확인했다. 아르곤 빔을 흑연 표적에 충돌시켜 베릴륨·리튬·헬륨 희귀동위원소를 만들었고 현재 분석이 진행 중이다.
지난 2011년부터 중이온가속기구축사업단이 꾸려졌지만, 단장만 있을 뿐 조직·자본·인력은 거의 전무했다. 오로지 꿈과 열정과 정신력으로 시작했는데, 불과 10년 만에 가시적인 결과가 나온 것이다.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라온보다 먼저 계획을 세웠지만 아직 완공되지 않은 중이온가속기 사례도 있다.”
-올해부터 본격적인 실험에 돌입하는데.
“저에너지 가속구간 연구과제 공모 절차가 진행 중이다. 마감 직전에서야 10~15건이 신청되지 않을까 예상한다. 대부분은 코브라를 이용한 실험을 신청하리라 생각한다. 중이온 가속기 특성상 빔타임이 워낙 적어서 일본 이화학연구소의 방사성동위원소빔팩토리(RIBF) 가속기도 30여개 정도의 제안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고에너지 구간까지 구축이 마무리돼야 라온이 완성된다고 들었다.
“현재 단일스포크가속관(SSR) 타입의 고에너지 구간 가속관을 6개 만들고 성능을 테스트해 결과를 분석하는 중이다. 스위치를 한번 누른다고 바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테스트만 해도 1~2개월이 소요된다.
실린더형의 반파장공명장치(HWR) 가속관이었으면 더 용이했을텐데, 결정 당시에는 두 방식이 큰 차이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제작성이 까다로운 원형의 SSR 타입을 선택해 더 꼼꼼히 검증해야 한다.
고에너지 구간까지 계속 진행은 확신한다. 이론적·기술적으로는 문제가 없어서 시간과 경험의 문제일 뿐이다. 만들어봐야 아는 영역이라 시행착오를 통해 목표치 성능이 나오는지 확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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