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 합병과 낫길티(Not guilty)
지난 10일 참여연대와 경제개혁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재벌총수 범죄 봐주기, 더 이상 안된다'라는 주제로 좌담회를 열었다. 오는 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관련 자본시장법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한 법원의 1심 선고를 앞둔 장외 여론전이 시작된 듯하다.
"재벌총수의 사익추구와 범죄행위에 책임을 묻지 않는 관행을 멈춰야 한다"는 주장은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해야 한다는 논리에선 맞는 얘기다. 다만 우리 헌법 제27조 제4항의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는 원칙에서는 벗어난 주장이다.
책임져야 할 범죄행위가 있다면 당연히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이는 검찰이 법정에서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의 입증을 했을 때'에 한정된 것이다.
형사소송법 제307조(증거재판주의)의 '①항 사실의 인정은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 ② 항 범죄사실의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이르러야 한다'고 돼 있다. 지난 106차례의 재판 과정에서 범죄사실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됐을까.
2020년 시작돼 3년 2개월 동안 진행된 106회 재판에서 검찰은 19만 페이지의 수사기록과 2만3000개의 증거제출, 80명의 증인신문과 600여개의 의견서를 제출하며 혐의 입증에 힘을 쏟았다. 기자는 2020년부터 이 재판을 보기 위해 수십 차례 법원을 찾았고, 보통 오전 10시부터 저녁 6시를 넘기는 시간까지 다수의 재판을 참관했다.
통상의 재판은 오전은 검찰의 공소사실에 대한 설시(쉽게 설명하는 것)나 증인신문이 진행되면, 오후에는 피고인 변호인들의 변론과 반대신문이 이어지는 형식이었다. 오전 검찰의 주장을 들어보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이 불법이라는 확신을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오후 변호인들의 반대신문을 들어보면 검찰 공소사실의 허점이 눈에 들어온다. 변호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문장이 "검사님께서 제시한 자료의 앞에 보면..." 또는 "검사님들이 제시한 자료의 바로 뒤에 보면.."이다. 검찰의 공소사실과는 반대되는 내용이 담긴 부분들이다.
예를 들면 "합병의 부정적 영향으로 인해 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했다"며 검찰이 제시한 주가 그래프를 변호인 측이 기간을 몇일만 더 확대하면 주가가 곧 반등하는 모습이 나오는 것 등이 쉬운 사례다.
같은 사실에 대한 것도 해석만 달리하면 다른 범죄사실이 된다. '프로젝트G'라는 문건을 두고도 검찰은 '경영권 승계를 목적으로' 준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변호인 측은 정부가 지속적으로 요구한 순환출자 해소를 통한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는 범죄로 가는 길이고, 하나는 정상적인 경영활동의 일부다.
이 문건과 관련해 실제 에버랜드 상장과 화학·방산 계열사 매각 등이 진행된 2014년과 2015년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의 경험에선 후자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들렸다.
당시 이건희 회장실이 있던 삼성전자 서초사옥 42층에는 삼성미래전략실장 방도 함께 있었다. 거기서 만난 최지성 미래전략실장에게 기자가 "이건희 회장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상장이나 계열사 매각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는지"를 물은 적이 있다. 이 때는 이 사안이 지금처럼 재판에 회부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시기다.
당시 최 실장은 "제가 이건희 회장님께 '정부가 삼성의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라고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며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설명했고, 이 회장이 쓰러지기 전에 두차례에 걸쳐 이에 대한 결재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신속하고도 쉽게 할 수 있었다"는 설명을 들었다.
당시 최 실장은 "이건희 회장님이 시키지 않은 일을 제가 해놓고 이 회장님이 다시 깨어났을 때 '누가 이렇게 하라고 했어?'라는 말을 하면 나는 바로 잘린다. 어떤 간 큰 월급쟁이가 그렇게 하겠느냐"라는 말로 지배구조 개선 작업이 이건희 회장이 쓰러지면서 갑자기 진행된 것이 아니라, 사전에 오래 준비된 것이라는 점을 말하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이재용 회장으로의 '경영권 승계를 목적으로'라는 검찰의 주장과 '정부의 요구에 따른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주장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이라는 동일한 행위에 대한 다른 해석이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기자는 후자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다.
106차례의 공판 과정은 '공격'과 '방어'의 지난한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변호인들은 검찰의 공소사실을 부인하거나 탄핵하는 여러 증거들을 통해 무죄 입증에 성공한 듯 보였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삼성물산 합병 재판의 결심공판 구형과정에서 변호인들은 당혹해 했다.
이전 수차례 재판에서 '합리적 의심이 배제될 정도의 입증이 이뤄지지 않은 내용'은 공소사실에서 빠질 것으로 기대했던 변호인들의 바람과는 달리 3년전 처음 기소할 때의 공소장 내용 그대를 기준으로 구형했기 때문이다. 피고인 변호인들은 "이미 앞선 공판에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입증된 것이 아니냐"며 "이렇게 할 거면 3년 여의 재판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항변했지만 변한 건 없었다.
재판을 오랫동안 유심히 지켜보지 않으면 어느 한쪽의 일방적 의견에 경도되기 싶다. 오전 재판만 들어보면 분명 유죄인데, 오후 재판에서 변호인 변론까지 들어보면 '무죄' 심증이 확실해진다. 형사소송법 제325조(무죄의 판결)에는 피고사건이 범죄로 되지 아니하거나 범죄사실의 증명이 없는 때에는 판결로써 무죄를 선고하여야 한다고 돼 있다.
민사소송의 경우 '고도의 개연성'만 입증되면 유죄를 선고하는 것과 달리 형사소송은 이보다 더 엄격한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의 입증이 되지 않을 때는 'Not guilty(유죄가 아니다)'를 선고하는 것이 형사소송법이 말하는 법관의 역할이다.
사실 이번 사건은 2020년 6월 26일 열린 대검 검찰수사심의위원회에서도 '기소불가' 의견과 함께 '수사중단' 의견까지 낸 적이 있는 사안이다. 기업의 정당한 경영활동을 부정행위로 보는 것에 대한 검찰 내외부 전문가들의 목소리였지만 무시됐다.
현대 사법체계는 '합리적 의심이 충분히 배제될 정도의 입증이 되지 않으면 피의자의 이익으로' 판결하도록 돼 있다. 유죄인 피고인을 무죄로 풀어주는 '제2종 오류'보다 무고한 피고인에 대한 유죄판단을 하는 '제1종 오류'를 줄이는 것이 사회정의에 가깝다고 보기 때문이다.
최근 고 이선균씨의 사례는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입증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죄추정'이 아닌 수사기관과 언론의 '유죄추정'의 심증이 만들어낸 사회적 타살이다. 무죄추정을 기반으로 한 공판중심주의와 증거우선주의의 사법 제도가 중요한 이유다. 오는 26일 1심 선고에서는 3년여 동안 이 재판을 공정하게 지켜본 재판부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hunter@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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