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을 갖춘 정치인의 레토릭 [세상읽기]
홍원식 | 동덕여대 ARETE 교양대학 교수
정치는 칼이 아니라 말로 하는 것이다. 이런 얘기에 ‘말만 잘하는 게 무슨 정치냐’고 되묻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애초에 정치란 말로 하는 미학적 싸움이 적어도 절반쯤은 본질일 수 있다. 애초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반씩 나뉜 사회에서,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상대를 아예 없애버릴 수는 없지 않겠는가. 결국, 상대방을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와 이념에 억지로 동의하게 만들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미학적으로 공감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정치적 능력이다. 그래서 정치인에게 이념과 가치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미학적인 표현 능력일 것이다.
정치사에서 뛰어난 연설로 높은 평가를 받는 몇몇 정치인들을 보면, 이들은 공통으로 자신의 가치와 지향을 뚜렷하게 제시하면서도 그 속에서 공동체의 화합, 통합 그리고 포용과 같은 보편적 ‘덕’을 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미국이 남북전쟁이라는 극단적 갈등을 맞이하던 중에서도 링컨 대통령은 상대에 대한 공감과 포용을 잃지 않았으며,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에 맞섰던 영국 처칠 총리도 불굴의 강인함 못지않게 강조한 것이 영국민 모두가 함께 겪는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었다. 현대 정치의 대표적 연설가로 꼽히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자주 썼던 수사법은 자신의 개인적 출신 배경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민주당과 공화당, 피부색, 종교, 출신 도시를 초월한 미국의 꿈(아메리칸드림)으로 청중의 공감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얼마 전 여당의 새로운 비상대책위원장이 취임하였다. 누군가는 한국 정치에 멋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적어도 그는 멋을 꽤 중요하게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법무부 장관으로서,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화면에 담길 때 종종 그가 보이고자 하는 모습들은 대중에게 비치는 외면에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말 한마디 할 때도 미디어에 전달되기 좋을 법하게 다듬고 꾸미는 모습을 보여, 말이 갖는 미학적 가치에도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여의도 사투리를 쓰지 않겠다”는 그가 본격 정치인으로 처음 내놓은 취임 연설이 얼마나 멋지게 나올지 적지 않은 기대를 했다. 그런데, 그의 취임 연설을 보고 과연 현재 우리 정치가 건강한 상태인지 오히려 더 큰 근심만 갖게 되었다.
오바마를 벤치마킹한 것인지 처칠을 오마주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원작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그 연설의 주어는 모든 국민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신과 자신의 지지자들이었다. 처칠의 연설을 연상시키는 대목에서 그의 연설은 민주당과 운동권을 적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상대로 “호남에서, 영남에서, 충청에서, 강원에서, 제주에서, 경기에서, 서울에서” 전쟁을 벌이겠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얼마 뒤 총선을 앞두고 있다고 하지만, 국민들이 참여하는 선거는 상대방을 총칼로 무찔러야 하는 전쟁이 아닐 뿐만 아니라 실제 전쟁을 앞두고라도 정치의 언어는 보편적 가치로서의 화합과 포용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맞는 문법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이런 전통적 문법은 그저 ‘여의도 사투리’ 정도로 여겨졌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레토릭에서 ‘덕’은 찾아볼 수 없고 ‘적’에 대한 적의만 가득 차 있었다.
여러 조사에서 우리 사회 갈등지수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특이한 점은 한국 사회의 전통적 갈등 요소인 빈부 격차, 계급 갈등, 지역 갈등은 점차 감소하고 있는 반면, 정당 갈등과 이념 갈등이 증폭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정치가 사회 갈등을 줄이는 게 아니라 이를 더 키우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2024년 대한민국의 새해는 칼부림으로 시작됐다. 뉴스에서 말하지 않아도, 국민들은 이번 야당 대표 피습의 범인이 누구인지 모두 알 것이다. 그 범인은 다름 아닌, 대한민국 정치다. 누구 손에 칼이 들려 있었던 것과 상관없이, 누구라도 칼을 들고 나서게 한 건 증오와 경멸의 말로 가득한 우리 정치의 현장이고, 이를 조장하고 무책임하게 전달하는 미디어에도 그 책임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미 빨간불이 켜진 지 오래지만, 더욱 진영화하고 있는 정치판에서 정치언어는 점점 더 독해지고만 있다. 정치의 ‘멋’이란 게 있다면 그건 ‘적’이 아니라 ‘덕’을 담는 정치인의 언어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걸 알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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