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요’의 노예가 됐다 그리고 서사를 잃었다 [EDITOR's 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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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농업혁명이 인류를 번성시켰다는 상식에 대한 도발이었습니다.
인류는 IT혁명에 흥분했습니다.
농업혁명이 인류에게 사기였다면, IT혁명은 직장인들에게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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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농업혁명이 인류를 번성시켰다는 상식에 대한 도발이었습니다. 신선했습니다.
그는 “수렵채집인보다 농부들이 훨씬 더 힘들게 일했고, 잘 먹지도 못했고, (가축화로 인해) 질병도 더 많이 얻었다”고 했습니다. 혁명의 역습이었습니다.
요즘 직장인들의 삶을 돌아보면 새삼 그의 통찰이 대단했음을 느낍니다. 인류는 IT혁명에 흥분했습니다. 우리를 편한 길로 안내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인터넷과 각종 소프트웨어, 스마트폰 앱, 인공지능(AI)까지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기대만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의 직장인들은 사무실 책상 앞에서 하루 종일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의미 있는 일을 한 기억은 많지 않습니다. 업무 효율에 1도 보탬이 안 되는 파워포인트는 또 누구를 위한 것인지. 짧은 쉬는 시간, 핸드폰을 꺼내 유튜브 짧은 영상을 봅니다. 아니면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남의 삶을 엿보다 시간을 흘려보냅니다. 잠자리도 핸드폰과 함께합니다. 농업혁명이 인류에게 사기였다면, IT혁명은 직장인들에게 무엇일까요.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비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수많은 미디어 채널이 생겼지만 소비자에게 접근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 아이러니한 현실.
기술의 진보가 우리로부터 앗아간 것은 또 있습니다. 생각과 서사입니다. 과거에는 출근길에 가사 없는 음악(클래식)을 들으며 무언가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담배를 피울 때도 생각이란 걸 했지요. 잠들기 전에도 상상이란 걸 머리맡에 있는 수첩에 뭔가를 끄적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잠시라도 핸드폰과 떨어져 있으면 불안합니다. 무언가 들여다보다 알고리즘인지 뭔지 때문에 뜨는 각종 단발마적 정보 속으로 또 빠져듭니다. 짧은 글에 익숙해져 긴 글은 부담스러워졌습니다. 생각이 자리 잡을 공간은 사라졌습니다. 핑계를 댑니다. “생각할 시간이 없다.” 그러다 진짜 생각이 없는 스스로를 발견한 후 깨닫습니다. ‘생각할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생각의 방법과 주제를 잃어버렸구나.’
생각의 빈곤이 가져다 주는 결과는 뜻밖입니다. 쉬는 날 유튜브를 보고,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무언가를 공유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며 하루를 보냅니다. 종일 누군가와 교류를 하며 하루를 마감했는데 고립감을 느끼곤 합니다.
왜 그럴까. 철학자 한병철은 ‘서사의 위기’에서 “스스로 자기 존재를 정보로 전락시키는 사회에서 개인은 각자의 서사를 잃고 우연성에 휩싸인 채 폭풍우 속에 부유한다”고 했습니다. 생각의 빈곤이 ‘자신만의 맥락과 삶의 이야기, 그리고 방향성’을 말하는 서사가 없는 공허한 삶으로 인도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현상도 있습니다. 공허함을 느낀 사람들이 많았나 봅니다. 글쓰기 강좌가 인기라고 합니다. 글은 생각의 결과입니다. 글을 쓰려면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과정이 자신의 서사를 찾아가는 여정이기를 바랍니다. 스마트폰의 지배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가 혹사당하지 않는 그런 길 말입니다.
이번 주 한경비즈니스는 베스트 애널리스트를 다뤘습니다. 불황과 혼돈의 시장에서 자신만의 직관과 관점을 가지고 투자자들의 길잡이 역할을 한 애널리스트입니다. 이들이 쓴 리포트는 정보의 나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산업과 기업, 거시경제에 관한 서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서사에서 영감을 얻고, 서사가 가리키는 방향을 읽었습니다. 그 결과가 베스트 애널리스트 아니었을까 합니다.
올해도 수많은 불확실성이 뇌관처럼 직장인과 투자자들 앞에 놓여 있습니다. 풍부한 서사와 인사이트로 가득 찬 글들이 험로를 개척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김용준 편집국장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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