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처럼 ‘잃어버린 30년’ 오나”… 韓 잠재성장률 0%대 위기 [심층기획-‘저성장의 늪’ 기로에 선 한국]
OECD, 2024년 한국 1.7%로 전망
‘2012년 후 매년 하락’ 8國 중 유일
저출산·고령화에 투자둔화 겹쳐… 경제 기초체력 ‘곤두박질’
노동인구 공급감소 폭 갈수록 커지고
경제 성숙기 자본생산성 제고 어려워
총요소생산성 기여도 대폭 저하 추세
“같은 노동·자본으로 더 많은 재화 창출”
정부, 신기술 개발 지원 등 팔 걷었지만
설익은 정책·反시장적 조치 잇단 논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예측한 2030~2060년 한국의 잠재성장률 평균치다. 불과 20년 전 4%를 훌쩍 넘었던 잠재성장률이 곤두박질치며 이제는 ‘0%대 성장 시대’를 눈앞에 두게 됐다. 이는 미국과 일본보다 낮은 수치로, 우리나라의 성장동력이 꺼져가고 있다는 의미다. 잠재성장률이란 물가를 자극하지 않고 최대한 성장할 수 있는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로, 경제의 기초 체력을 나타낸다.
잠재성장률이 하락하는 원인은 복합적이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생산연령 감소, 부진한 노동시장 구조개혁, 각종 규제에 따른 기술혁신 지체 등이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세계일보는 5회에 걸쳐 우리 경제를 위협하고 있는 요인들을 분석하고,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한 전문가들의 해법을 제시한다.
정부도 잠재성장률 하락을 엄중하게 보고 있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한 토론회에서 “우리 경제는 잠재성장률이 지속 하락하고 있다”며 “올해가 경제의 재도약을 위해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윤석열정부는 출범과 함께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한 3대 구조개혁(노동·연금·교육)을 약속했다. 하지만 출범 후 1년 7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시장경제에 역행하거나 포퓰리즘(대중영합) 정책으로 성장 동력을 갉아먹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남아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면서 정부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잠재성장률 제고 방안 마련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 조언했다.
◆코앞에 닥친 잠재성장률 ‘0%’
14일 OECD와 한국은행 등에 따르면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012년 3.8%를 기록한 이후 올해 1.7%로 예측되기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하락했다. 하락 폭도 비교 가능한 국가를 찾기 힘들 정도다. 2001년만 해도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5.4%에 달했다. 미국(3.6%)은 물론 영국(2.6%), 프랑스(2.4%), 일본(0.7%)과 비교해 성장 가능성이 월등히 높았다. 하지만 2001년 대비 올해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약 3.4%포인트나 낮아져 올해 미국(1.9%)에 근접한 수준으로 낮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개발도상국일수록 잠재성장률이 높다는 점에서 한국의 하락세도 일정 부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동일 경제 규모를 기준으로 주요국의 사례를 비교해 봐도 한국의 잠재성장률 하락세는 이례적이다. 이동진 상명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사라진 경제성장의 역동성과 변동성’ 연구에서 각국이 1인당 국내총생산(GDP) 2만2000달러에 도달한 시기를 시작으로 잠재성장률 변화를 비교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한국이 1인당 GDP 2만2000달러에 도달한 2000년 잠재성장률은 5.03%였지만 15년 후인 2015년에는 2.92%로 하락했다. 하락 폭이 40%에 달한다.
문제는 잠재성장률이 반등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데 있다. 일반적으로 잠재성장률은 노동과 자본의 생산성에 더해 신기술 개발, 경영 혁신 등을 나타내는 ‘총요소생산성’의 합으로 설명된다.
저출산·고령화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노동 공급의 감소 폭은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 통계청의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생산연령인구(15~64세)는 2022년 3674만명에서 2030년 3417만명, 2040년 2903만명으로 줄어든다. 2020년대에만 연평균 32만명, 2030년대에는 50만명씩 노동력 손실이 발생하는 셈이다. 자본의 생산성도 기대하기 힘든 수준이다. 우리나라 경제가 성숙기에 진입하면서 투자 둔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총요소생산성 역시 하락세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 추정’ 보고서에 따르면 ∼2005년 한국의 잠재성장률 5.1%에서 총요소생산성이 2.2%포인트를 차지했으나 2019∼2020년에는 잠재성장률 2.5%에서 총요소생산성의 기여도는 0.9%포인트로 대폭 쪼그라들었다.
잠재성장률 하락은 곧 경제성장률 하락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2012년 2.4%를 나타낸 뒤 2013년과 2014년 각각 3.2%로 반등했다가 2015년 2.8%로 하락했다. 이후 등락을 거듭하다 2019년 2.2%를 기록한 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2020년 –0.7%로 떨어졌다. 이후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 등 유동성 증가에 힘입어 2021년 성장률이 4.1%로 상승했지만 2022년 2.6%, 지난해 1.4%를 나타내는 등 최근 들어 저성장 기조가 자리 잡고 있다.
OECD가 지난해 11월 내놓은 경제 전망에서 2025년 성장률이 2024년보다 낮은 국가는 38개 회원국 한국과 멕시코 두 곳뿐이다. 2025년 기준금리를 연 2.50%로 현 수준보다 1%포인트 인하할 것으로 보면서도 성장률을 낮춰 잡은 것이다.
정부도 잠재성장률의 하락세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윤석열정부는 잠재성장률 제고를 위해 낡은 규제 혁신과 디지털, 인공지능(AI) 등 신기술 개발 지원에 주력하고 있다. 이를 통해 동일한 노동과 자본을 들이더라도 더 많은 재화를 창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취지다. 돈을 풀어 수요를 늘렸던 이전 정부와 다른 정책방향을 잡은 것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윤석열정부의 경제정책은 금리를 낮추거나 재정을 풀어 수요를 늘리는 방향이 아니다”라면서 “구조개혁을 통해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기업의 비용을 줄이겠다는 것이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반시장·포퓰리즘 정책 논란
하지만 정부 출범 후 1년 7개월이 흐른 현재 3대 구조개혁의 성적표는 초라하다. 각 정부 부처에 따르면 노동 개혁에서는 주 52시간 폐지 등 설익은 정책이 남발돼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또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 및 처우 격차 같은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문제는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연금 개혁은 정부가 노후소득 보장강화, 세대 형평과 국민 신뢰 제고 등 5개 분야 총 15개 과제를 담은 종합운영계획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등의 구체적인 수치가 빠진 채였다. 게다가 올해 미래개혁자문단과 재정추계실무단이 가동되는 등 국회 공론화 절차도 남아 있어 갈 갈이 멀다. 교육개혁도 ‘만 5세 조기입학’, ‘킬러 문항’ 등 지엽적인 문제에만 매달린 결과 교육격차 해소, 인재양성 등 정작 중요한 과제는 손도 못 댄 상황이란 평가다.
정부가 최근 발표한 경제정책방향에서도 노동 부문은 “올해 상반기 중 ‘이중구조 개선대책’을 마련하겠다”고만 나타났을 뿐 구체적 로드맵은 없었다. 연금 부문 역시 관계부처 협의체를 통해 다층적 노후소득 개편방안을 논의하겠다는 선언적 내용만 들어가는 데 그쳤다.
무분별한 감세 조치가 이행되고 있는 것 역시 문제라는 지적이다. 윤 대통령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이유로 추진하겠다는 금융투자소득세 폐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국 증시를 저평가하는 주체는 외국인으로 금투세 대상에 해당하지도 않고, 미국, 독일, 일본 등 세계적 추세도 금투세 시행 쪽이라 이는 사실상 인기를 의식한 ‘부자감세’라는 비판이 나온다. 기재부에 따르면 지난해 국세수입은 본예산(400조5000억원) 대비 59조1000억원 정도 부족할 것으로 전망된다.
황윤재 한국경제학회장은 “공공요금 통제 혹은 시중은행 금리 인하 압력 등 반시장적 정책은 시장실패 발생 시 일시적으로 시행해야지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시행할 경우 더 큰 잠재적 비용을 유발할 수 있다”며 “잠재성장률 제고를 위한 3대 노동개혁을 본격화하고 과감한 규제 개혁에 나서 경제역동성을 살리는 데 집중할 때”라고 강조했다.
◆잠재성장률 급락세, 30년 전 日 ‘판박이’
한국의 잠재성장률 급락세는 약 30년 전부터 하강 곡선을 그린 일본 경제와 유사하다는 분석이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 한국에서도 재현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실제 고령화, 과잉 부채 등 일본 경제 성장률을 떨어뜨렸던 악재들은 한국에도 위협요인이 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일본을 답습하지 않으려면 미국을 모델 삼아 산업 구조조정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잠재성장률 하락세는 우리나라에서도 관찰된다. 1인당 GDP 2만2000달러에 도달한 2000년 5.03%였던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은 2005년(3.91%), 2010년(3.5%) 하락세를 이어가다 2015년에는 2.91%까지 추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에서 더 극단적인 하락세가 관찰되지만 1985년 ‘플라자합의’로 엔화 가치가 2년 만에 65.7% 절상된 영향과 1991년 버블경제 붕괴를 감안할 필요가 있다. 반면 미국, 유럽연합(EU) 등 다른 선진국에서는 이처럼 잠재성장률이 급격히 떨어지는 모습은 발견되지 않는다.
한국은 구조적으로 일본과 비슷한 약점을 안고 있다. IBK경제연구소는 ‘한·일 저성장 비교’ 보고서에서 한국이 30년 전 일본이 겪었던 고령화, 민간의 과잉부채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진단했다. 일본의 총부양률(비생산인구를 생산인구로 나눈 값)을 보면 1990년에 44%로 최저점을 찍은 뒤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이와 유사하게 한국도 장기간 지속된 저출산으로 2015년 총부양률 36%로 최저점을 찍은 뒤 계속해서 상승하는 추세다. 2058년에는 100%를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같은 생산인구의 감소는 노동력 감소로 인한 생산성 하락, 부양부담 증가로 인한 소비 침체 등 경제 성장의 악재로 작용한다.
가계부채와 민간부채(가계+기업)의 경우 일본의 버블 정점기보다 한국의 상황이 더 심각하다. 일본의 1989년 자산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1.4%였던 반면, 지난해 한국의 가계부채 비율은 17.2%를 기록했다. 민간부채의 경우 일본은 1994년 214.2%로 정점을 찍었고, 한국은 지난해 225.6%에 달했다.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재로써는 한국이 일본을 답습할 가능성이 크다”며 “저출산은 유사하고 소재 부품이나 최근 대(對)중국 수출이 줄어드는 상황은 과거 일본의 상황보다 더 어렵다”고 우려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일본은 정점 이후 재정정책과 금융정책에만 매달린 반면 미국은 산업구조조정에 집중했고, 2010년대 이후 경제의 차이가 발생했다”며 우리나라의 산업부문에 대한 혁신 필요성을 강조했다.
채명준 기자, 세종=이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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