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살롱] [1429] ‘물’자 명당
살아 볼수록 인생이 충만감이 들어야 하는데, 이와는 반대로 허무감만 피어 오른다. 인생을 잘못 살았단 말인가! 허무감이 들 때마다 산천을 둘러본다. 자연이 나를 위로한다. 전국에 산재한 명당을 둘러볼 때 그나마 위안이 된다. 오늘은 그 지세가 ‘물(勿)’ 자 모양으로 생긴 세 군데를 이야기하고 싶다.
먼저 경주의 양동 마을이다. 한국의 양반 동네 품격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동네가 바로 양동이다. 서너 가닥의 미니 골짜기가 동네를 형성하고 있고, 그 골짜기의 언덕에 고택들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시대의 ‘베벌리 힐스’가 양동이다. ‘勿’ 자 형국으로 생긴 동네는 외손들이 발복한다는 게 풍수가의 이야기이다. 우백호 자락이 풍성하기 때문이다. 우재 손중돈 선생의 집안 외손이 회재 이언적이다. 손씨 집 외손인 양동 이씨들이 발복한 터이기도 하다.
그 다음은 경남 산청군의 신등면에 있는 ‘법물김씨(法勿金氏)’ 들의 동네이다. 이 동네도 황매산에서부터 굽이굽이 흘러오다가 동네 뒤쪽에 와서 ‘勿' 자처럼 내려와 여러 가닥 뭉쳤다. 그 내려온 자락마다에 집들이 들어서 있다. 옛날 사람들은 이러한 산세의 모습을 아주 상서롭게 본 것 같다. 고려 후기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유가에서 말하는 수신의 핵심이 4가지를 하지 말라는 ‘사물잠(四勿箴)’이다. ‘비례물동(非禮勿動,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비례물언(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라) 비례물시(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라) 비례물청(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라).’ 이 4가지 ‘勿'만 지키면 선비 집안의 수신과 처세에 문제가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 ‘4勿’을 법으로 알고 지킨다는 다짐이 주변에 소문이 나서 법물김씨로 불리지 않았나 싶다. 마침 동네 풍수 형국도 ‘물’ 자로 생겼으니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서로 일치한 셈이다. 조선 당쟁의 최고봉 선수였던 우암 송시열의 암서재(巖棲齋) 바위에도 ‘비례부동(非禮不動)’이 새겨져 있다.
세 번째 물자 명당이 전남 화순에 있는 물염정(勿染亭)이다. ‘오염되지 않고 순수성을 지킬 수 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여기는 물 자 형국으로 생긴 터는 아니다. 안동 하회마을처럼 정자 주변을 냇물이 원을 그리면서 둥그렇게 감아 돌아가는 터이다. 언뜻 보아서는 섬처럼 되어 있다. 물이 이처럼 사방을 감아 돌아가면 풍진 세상의 티끌이 달라붙지 못한다고 믿었다. ‘요단강 건너가 만나세’라는 찬송가처럼 물은 이승과 저승, 속세와 선경을 구분짓는 경계선 역할을 한다. 김삿갓이 죽을 때까지 머물렀던 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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