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도발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징검다리’ ‘돈줄’ ‘동네북’.
기분 나쁘지만 북한에 한국의 용도는 위의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징검다리는 미국에 접근하기 위해 한국을 이용한다는 의미다. 대표적 사례가 2018년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집권한 뒤 관계 회복 가능성을 엿본 북한은 한국을 징검다리로 이용하려 했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된 뒤 북한에 가장 중요한 전략적 생존 과제는 미국과 손을 잡는 것이었다.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양다리 외교로 수십 년을 살아오다가 한 축이 부러지자, 이번엔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양다리를 타려 한 것이다.
북한은 미국과의 수교 없이는 대북 제재를 풀 수 없고 경제난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정상 국가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미국에서 대통령이 인권 탄압으로 악명 높은 북한 세습 독재자와 손을 잡는다는 것은 재선을 포기하는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다. 북한의 시도는 체제의 획기적인 변화 없이 이뤄지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북-미 수교나 대북제재 해제, 국제사회 진출 등 북한에 절실한 것들은 모두 미국이 쥐고 있다. 그 대신 한국에는 대북 경제 지원을 할 능력 정도는 있다. 2002년부터 시작해 2009년까지 북한은 매년 식량 40만 t, 비료 10만 t 등 각종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북한은 ‘밥값’은 하려고 노력했다. 지원 기간 인명 피해를 초래하는 어떠한 도발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위의 두 용도로 사용하기 어렵거나, 내부에 더 중요한 일이 생기면 북한은 한국을 가차 없이 동네북으로 사용했다.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직전 3년이 그랬다.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김정일은 죽음이 다가옴을 직감했다. 그는 사망 전까지 3년 남짓을 오로지 후계 구도를 완성시키는 데 몰두했다. 대문을 열고 비밀스러운 집안일을 처리할 수는 없는 법. 이명박 정부가 대북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한 것도 아니지만 김정일은 한국의 용도를 다른 곳에서 찾았다.
2010년의 천안함 공격과 연평도 포사격은 내외부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의도적인 도발이었다. 사람들은 북소리가 요란한 곳을 쳐다보기 마련이다. 2010년의 도발은 김정은이 업적을 쌓기 위해 한 짓이라는 분석들도 있지만 북한 시스템에서 김정일의 지시 없이 후계자가 단독으로 그런 일을 저지를 수는 없다. 이런 도발의 결과 북한은 스스로 내부 빗장을 걸어 잠그고 세습에 필요한 시간을 벌고, 김정은을 강력한 지도자로 미화시켰다. 북한 사람들이 전쟁이 터질까봐 걱정하는 사이 김정일은 아들에게 당과 군, 비밀경찰과 금고 등을 차례로 물려주었고, 세습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을 숙청했다.
올해 북한은 다시금 한국을 동네북으로 활용하려 한다. 김정은은 새해 벽두부터 한국을 주적, 적대적 교전 국가로 규정하고 가용한 무력을 총동원해 초토화하겠다며 위협 수위를 끌어올리고 있다.
의도는 뻔하다. 6년째 이어지는 사상 최강의 대북제재, 3년간의 코로나 셀프 봉쇄로 경제가 파탄 난 상황에서 김정은은 김주애로의 후계 구도를 완성시키려 하고 있다. 민생이 도탄에 빠졌는데 열한 살짜리 어린 딸을 위한 4대 세습에만 집착하고 있느냐란 원성을 누르기 위해 김정은에게 필요한 것은 비상계엄령과 시선을 돌리기 위한 북소리다. 전쟁 위기를 고조시켜야 ‘준전시 상태’ ‘전시 상태’로 내부 통제 수위를 높일 수 있다.
그러면 김정은은 주애를 위한 시간도 벌고, 주민들의 시선도 돌리며, 4대 세습에 반대하는 ‘눈빛이 불량한 자’들을 전시 상태에 준하는 즉결처분으로 제거할 수 있다. 새해 벽두부터 김정은은 그 방향으로 판을 깔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이 북한이 울릴 포성에 대비해야 할 순간도 다가오고 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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