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출판계 ‘창작의 집’ 사라졌다[빼앗긴 공간, 밀려난 사람]
젊은 예술인 지원센터 wrm
서울시 계약 종료로 곧 폐관
시 “윗선에서 결정된 일”
플랫폼P 등 다른 공간들도
문화예술 예산 삭감에 휘청
“집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죠. 이제 어디서 창작 활동을 해야 하나 착잡하기도 하고….”
지난 12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마포디자인·출판지원센터(wrm)를 찾은 디자이너 정지영씨(29)가 말했다.
정씨는 개인 작업을 하거나 고객과 소통하는 공간으로 wrm을 일주일에 한 번꼴로 방문해왔다고 했다. 하지만 다음달부터는 이곳을 이용할 수 없다. 7년간 운영돼 온 wrm이 이달 말 문을 닫기 때문이다.
디자인과 출판 종사자들이 관련 서적 3200여권을 열람할 수 있고 필요한 작업까지 할 수 있도록 개방해 온 ‘레퍼런스 룸’은 폐관에 앞서 지난 12일 운영을 종료했다. wrm은 대관 공간인 ‘wrm 스페이스’의 마지막 전시가 끝나는 22일 이후 본격적으로 퇴거를 준비할 예정이다.
wrm은 2017년 디자인·출판 산업 진흥과 건강한 산업 생태계 조성을 목적으로 홍대거리 인근에 문을 열었다. 실무자를 대상으로 한 워크숍 등을 수시로 열었고 필요한 전시공간을 제공하는 역할도 해왔다.
개소 이후엔 서울시와 2~3년마다 위탁 계약을 연장해 가며 운영돼 왔는데, 서울시 측에서 지난해 초부터 ‘계약 기간 종료 후 연장 의사 없음’이란 의사를 내비쳐 왔다.
박소현 wrm 센터장(47)은 “(서울시 관계자들은) 사업 기간이 종료됐고 윗선에서 결정된 일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며 사업 종료 이유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했다.
wrm은 디자인·출판 전공 대학생들부터 관련 취업준비생, 입직 2~3년 차의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초점을 맞춰 지원사업을 벌여왔다. 실무적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세미나와 워크숍을 비롯해 사회초년생의 고민을 들어주는 상담소 등 실무부터 심리적 차원까지 폭넓게 지원해온 것이다. 자본이 부족한 1인 출판사와 디자인 창작자를 지원하고 홍보를 도와주는 일도 해왔다.
마지막 개방일인 지난 12일 레퍼런스 룸을 찾은 시민들은 wrm이 더 이상 운영되지 않는다는 소식에 아쉬움을 표했다. 대학생 때부터 wrm을 찾았다는 프리랜서 디자이너 김현지씨(27)는 “일반 도서관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판형의 디자인 서적들을 한 공간에서 볼 수 있어 기회가 되면 꼭 들렀다”며 “출판 분야에 관한 지원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 속상하다”고 했다.
디자인 분야에 관심이 많아 종종 wrm을 찾았다는 이모씨(27)는 “문 닫는다는 소식을 듣고 최근에 자주 방문해서 책이나 사진집을 읽고 있다”며 “올 때마다 세금이 이런 곳에 쓰인다면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디자인·출판계 종사자들은 입을 모아 자신들을 위한 공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출판사 인공위성+82의 대표 송명규씨(26)는 “wrm이 대관해줘서 전시를 할 수 있었다”며 “wrm뿐만 아니라 플랫폼P도 위기에 처해 있어 출판계 종사자로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출판 관련 창작자들을 지원하는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 플랫폼P는 2022년 7월 박강수 마포구청장 취임 후 운영 방침을 두고 지난해 내내 갈등을 겪어왔다. 플랫폼P를 운영하는 위탁운영사를 선정하는 과정, 입주 자격을 마포구민으로 제한하는 조치 등을 두고 의견이 충돌해왔다.
15년 동안 젊은 예술인들에게 전시 공간을 제공했던 서울 마포구의 서교예술실험센터도 지난달 문을 닫았다. 마포구 소유의 센터 건물 노후화에 따른 복원 공사를 위한 조치라고는 하지만 서울시와의 건물 무상사용 임대 계약이 해지됐기 때문에 공사 이후 다시 센터가 입주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서울여성가족재단이 서울 노원구에서 위탁 운영 중인 창업보육시설 ‘서울여성공예센터 더아리움’도 서울시의 사업 종료 결정으로 입주 기업들은 다음달까지 센터에서 나가야 하는 처지다.
디자이너 지망생인 김나무씨(30)는 “정부 예산이 전체적으로 삭감되고 있는데, 실용성이 떨어진다고 생각되는 문화예술 분야 지원을 줄이는 게 우선순위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글·사진 배시은 기자 sieun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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