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남 송출 중단한 평양방송
북한의 대남(對南) 국영 라디오 ‘평양방송’이 지난 12일 오후부터 수신이 되지 않고 있다. 평양방송의 홈페이지 ‘민족대단결’도 접속 불가 상태다. 조선중앙방송과 함께 북한 양대 라디오 매체인 평양방송은 1960년대부터 대남 선전·선동 방송을 하면서 남파 간첩들에게 ‘난수(亂數)방송’으로 지령을 내려왔다.
▶”지금부터 27호 탐사대원들을 위한 원격 교육대학 수학 복습 과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459페이지 35번, 913페이지 55번.” 2016년 포착된 난수방송의 하나다. 평양방송은 오전 6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30분까지 하루 23시간30분 방송하면서 자정에 김일성·김정일 찬양가를 내보낸 뒤 난수방송을 해왔다.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난수방송을 중단했다가 2016년 6월 재개했다. 난수방송은 특정한 규칙을 가지지 않는 숫자를 나열한 뒤 난수표나 사전에 약속한 책 등을 활용해 해독한다. 2006년 체포된 간첩은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을 난수 해독에 사용했다.
▶1968년 김신조 일당의 1·21 청와대 습격 사태는 난수방송 해독을 못해 감행됐다는 황당한 일화도 있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 임무를 띠고 침투한 북한 124 특수부대원 31명은 서울로 향하는 와중에 파주 삼봉산에서 나무꾼 우씨 4형제와 마주쳐 정체가 발각됐다. 북에 보고하고 난수방송으로 북한 지령을 받았는데 잘못된 난수표를 들고 있던 통신병 2명이 해독을 못했다. 김신조씨는 “우리를 그냥 죽으라고 한 것이다. 배신감이 들었다”고 했다. 바뀐 지령을 확인하지 못한 채 애초 작전대로 청와대로 향했다가 거의 전원 사살되고 김신조씨만 투항했다. 나중에 우리 측이 이 난수를 해독했더니 북의 지령은 ‘원대 복귀’하라는 것이었다.
▶옛날 간첩 신고 포스터를 보면 간첩 식별 요령의 하나로 ‘밤중에 방 안 또는 산속에서 이상한 금속 소리(무전 치는)를 내거나 이북 방송을 듣는 사람’이 들어 있다. 심야에 이불 뒤집어 쓰고 난수 방송을 듣고 북한에 보고하려고 모스 부호를 치는데 이를 위치 추적해 간첩을 색출해 냈다. 디지털 시대에는 난수 방송보다 보안 이메일을 더 많이 쓴다. 하지만 오래전에 남파된 ‘컴맹’ 간첩은 보안 이메일을 쓸 줄 몰라 여전히 난수 방송이 필요하다고 한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대남 정책 기조를 “적대적인 교전국”이라고 선언한 뒤 최선희 외무상이 대남 선전 매체와 대남 기구를 정리하고 있다. 평양방송 중단도 그 일환이다. 북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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