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라노] ‘나쁜 부모’ 양육비 지급 압박했는데… ‘배드파더스’는 왜 유죄인가
대법원 "사적 제재 용납할 수 없어"
양육비 받을 수 있는 환경 만들어야
“‘나쁜 아빠’ ‘나쁜 엄마’ 입장에서는 열 받겠죠. 수천 명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사실을 법원이 인정하고 유죄라고 판결까지 했는데 처벌은 안 받으니까요. 불만이 많을 겁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겠죠. 양육비 미지급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행위는 명예훼손이라고 법원이 못을 박았으니까요. 이제부터는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아도 신상공개를 하겠다고 압박할 수 없으니 ‘양육비 안 줘도 되겠네?’ 이러겠죠. 양육비 미지급자들은 양가적인 감정이 들 겁니다.”
뉴스레터 ‘뭐라노’의 마스코트 라노입니다. 여러분은 양육비 미지급자에 대해 정부가 조치를 취하기 전인 2018년 7월부터 양육비 미지급자의 사진, 이름, 출생 연도, 거주지, 직장명 등을 공개한 사이트 ‘배드파더스(Bad Fathers)‘를 아시나요? 배드파더스는 한때 하루 평균 방문자가 7만~8만 명에 이를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는데요. 배드파더스를 운영했던 구본창(61) 씨가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후 유죄 판결을 받자 또다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어요.
나쁜 아빠들이란 뜻을 가진 인터넷 사이트 ‘배드파더스’에는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은 부모들의 사진과 실명, 거주지 등을 포함한 신상정보가 공개됩니다. 구 씨는 2018년 9월부터 10월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자녀의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은 부모라고 제보를 받은 사람의 신상정보를 배드파더스 사이트에 공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배드파더스의 파격적인 행보를 두고 여론이 나눠졌는데요. 양육비 미지급이라는 공적 사안에 대한 여론 형성에 기여했기 때문에 죄가 없다는 여론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적 제재는 옳지 않다는 여론이었습니다. 법원의 판단도 엇갈렸죠.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은 7명의 국민배심원이 만장일치로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재판부 역시 무죄를 선고했죠. 신상공개는 양육비 지급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공익상의 목적을 인정했고, 양육비 미지급 부모들이 자초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신상공개를 유죄라고 판단하고 벌금 100만 원의 선고를 유예했습니다. 대법원도 2심 결론을 인정했습니다. 대법원은 구 씨가 양육비 미지급 문제를 공론화 시킨 점은 인정했지만, 그렇다고 사적 제재를 용납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죠. 대법원 2부는 지난 4일 정보통신망법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구 씨에게 벌금 100만 원의 선고를 유예한 원심을 확정했습니다. 선고유예는 범죄 정황이 경미한 자에게 일정 기간 형의 선고를 미루고 유예일로부터 2년이 지나면 선고를 면해주는 것으로 집행유예보다 가벼운 처벌입니다.
구 씨는 대법원의 선고유예 판결에 대해 “우울합니다. 처벌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어쨌든 유죄 판결이 난 것이니까요. 배드파더스는 양육비를 지급받지 못해서 고통받던 아이들을 1000명 이상 도와줬습니다.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도와준 것이 죄가 있는 행동이었다고 해버리면 누구나 다 무력해지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사이트 운영을 이어나갈지, 이어나가지 않을지도 결정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토로했습니다. 양육비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도와 양육비를 받을 수 있도록 힘썼는데, 고스란히 발목을 옭아매는 죄로 돌아왔죠.
라노는 많은 사람들이 양육비를 받지 못해 사적 단체를 찾아가 양육비를 지급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한 것이 이상하다고 느껴졌습니다. 나라에서 양육비를 지급하라고 명령한 것이고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정부 기관에서 압박해 양육비를 지급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같은데, 이 일을 사적 단체가 대신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구 씨는 한국의 양육비 지급 현실을 ‘도둑질을 해서 잡혀도 처벌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상태’로 비유했습니다. 도둑질을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면 누구나 도둑질을 할 것입니다. 지금의 한국은 양육비 미지급자에 대한 사회적 불이익이나 압박, 법적 제재를 가하지 않기 때문에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이들이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이 생겼습니다. 현행법이 양육비를 주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든 상황에서 양육비 미지급율은 높을 수밖에 없죠. 실제로 여성가족부가 실시한 2021년 한부모가족실태조사에 따르면 비양육부모로부터 양육비를 받지 못한 비율은 72.1%로 밝혀졌습니다. 2021년 기준 양육비 이행률은 36.6%에 그쳤죠.
여성가족부는 2021년 7월부터 나쁜 아빠·나쁜 엄마의 신상 공개를 시작했습니다. ‘양육비 이행법’ 시행령이 개정되며 양육비 미지급자의 신상을 공개할 수 있게 된 것이 계기였습니다. 하지만 여가부는 양육비 미지급자의 사진 없이 이름과 주소 등만 공개했습니다. 사진 없이 이름과 주소 등의 신상 만으로는 미지급자가 누군지 특정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여가부의 신상공개 시작으로 잠시 문을 닫았던 배드파더스는 ‘양육비를 해결하는 사람들(양해들)’로 이름을 바꿔 양육비 미지급자의 명단을 다시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양육비 이행법 시행령 개정으로 양육비 미지급자 신상공개뿐만 아니라 출국금지와 운전면허 정지 처분도 가능해졌습니다. 지금까지 여가부를 통해 명단이 공개된 나쁜 아빠·나쁜 엄마는 모두 72명입니다. 492명은 출국이 금지됐고, 461명은 운전면허가 정지됐습니다. 하지만 이 중 121명만이 양육비 채무액 전부 또는 일부만을 지급했습니다. 이 때문에 여가부의 제재 조치에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또 이런 조치가 이뤄지려면 먼저 가정법원에서 양육비 채무자에 대한 감치 명령을 받아야 하고, 이후에도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으면 그제야 내려지는 조치이기 때문에 효과적이지 않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양육비와 관련해 발의된 법안 9개가 아직까지 국회에 계류돼 있습니다. 이것만 통과시켜도 양육비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거예요. 현행 양육비 이행법의 실효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실효성을 높여야 해요.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양육비 법안들이 국회에 이미 발의가 돼있기 때문에 법안들만 통과시키면 되죠. 아이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국가가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 씨는 적극적인 제도 도입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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