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想과 세상] 허물

기자 2024. 1. 1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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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장 쪽 둔덕을 내려온 초록색 뱀은
내 오른손 검지를 스쳐
오엽딸기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산길에 떨어진 골프공을 줍던 나도 놀라고 비탈을 흐르던 저도 놀라고
야생이 스쳐간 손에 뱀 비린내가 돋아
슬픔이 독처럼 몸에 퍼졌다

직립의 슬픔과 배로 가는 슬픔이 서로 감염되어
산에 슬픔이 가득했다
슬픔을 끌고 산을 나왔다
뱀은 느티나무 아래 나를 벗어두고 갔다

허물 한 채에 적힌 결승문자를 받아 읽었다
숲이 커야
사람도 슬픔을 벗을 수 있다고

조정(1956~)

어느 날 시인은 산길에서 골프공을 줍다가 뱀을 만났다. 야생의 몸이 시인의 손을 스치고 지나가자, 몸에 ‘독’이 번졌다. 시인의 슬픔과 뱀의 슬픔이 “서로 감염”되어 산은 온통 슬픔으로 아득해졌다. 산에서 내려오다가 시인은 ‘허물’을 보는데, “뱀이 느티나무 아래” 벗어두고 간 ‘나’였다. ‘나’인 “허물 한 채”와 온전히 마주한 순간, 시인은 자연의 언어를 회복한다.

시인은 산황산에다 골프장을 늘리려는, 굴삭기 같은 야만에 맞서 오랫동안 싸웠다. 부엉이, 소쩍새, 직박구리, 산갈나무, 너도밤나무들과 한 몸이 되어 산을 지켰다. 개미와 딱정벌레들은 바리케이드를 쳤고, 나뭇잎들은 산의 신음을 멀리 타전했다. 숲의 정령들은 손뼉을 치며 응원했다. 뱀의 허물에 적힌 “결승문자”의 비밀이 마법처럼 풀리자, 산은 죽지 않고 시가 되었다. 야생이 전해준 비밀들로 시인의 눈은 씨앗처럼 열리고 마음의 골짜기에 꽁꽁 언 고드름이 녹아내렸다. 숲이 말하기 시작했다.

이설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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