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정당은 정당일 뿐이다
오는 15일(현지시간) 열리는 아이오와 코커스를 시작으로 미 대선 레이스가 본격화된다. 이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 미국인에게 우리 정당이 지는 것은 단순히 내가 원하는 정책이 반영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 인종, 사회적 지위와 도덕적 기준 등 자신의 모든 정체성이 그 ‘한 표’에 담겨 있다. 그러므로 선거 결과에 승복 따위는 할 수 없다. 우리 정당의 패배는 곧 나의 실존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이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정치학 교수인 릴리아나 메이슨은 이를 두고 정당이 그 사람의 “메가 아이덴티티”, 즉 ‘거대 정체성’이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람은 무수한 정체성의 조합으로 이뤄져 있다. 미 중부 지역에서 나고 자란 기독교 백인 남성이면서 부자 증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노동계급일 수도 있고, 남부 출신이지만 지금은 동부에 살고 있는 무신교 흑인 여성이면서 임신중지에 찬성하는 금융계 종사자일 수도 있다. 이처럼 인종·젠더·계급 등 여러 정체성이 교차하는 어느 한 지점에서 정치적 입장이 형성되고, 그것이 정당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는 것이니 분명 정당도 자신을 정의하는 특징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메이슨의 말처럼 정당이 그 자체로 거대한 정체성 집단이 되는 경우다. 원래 정당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의 정책적 대의를 위해 모인 ‘교집합’이다. 빈곤을 퇴치하고, 재난 방지 대책을 세우기 위해 반드시 같은 정체성을 공유할 필요는 없다. 내가 생각하는 정책의 우선순위와 정당이 정한 우선순위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더 많은 교집합을 가진 다른 정당으로 옮겨갈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변화하는 지지자의 목소리를 담아내기 위해 정당 스스로가 바뀌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 몇년 사이 미국에서는 정책이 아니라, 정체성과 정당이 일체화하는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다. 시카고대 여론연구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4년제 대학 학위가 없는 백인은 1990년대 초까지 두 정당 사이에 균등하게 분포했지만, 현재 이들 중 자신을 민주당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양당 내 기독교인의 비율은 비슷했지만, 지금 기독교인은 자신을 공화당원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최근 미국에서는 교회에 가는 대신 정치 유튜브에 몰두하는 복음주의 개신교 유권자층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이들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가 아니라 미국을 타락시키는 민주당을 물리쳐줄 도널드 트럼프이기 때문이다. ‘공화당 지지자’라는 정체성이 다른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상위 정체성’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양한 이유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불안감과 염원을 트럼프의 공화당에 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이슨은 백인우월주의, LGBT와 이민자에 대한 반감 등은 미국 내에서 언제나 존재해 왔던 것이지만 이들이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된 경우는 많지 않았다면서, “트럼프가 여러 정치적 스펙트럼에 흩어져 있던 사람을 거대 정체성으로 뭉쳐내는 피뢰침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정체성이 정당으로 수렴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정당의 위기와 나의 위기가 동일시된다. 트럼프가 기소되는 것은 트럼프의 문제여야 마땅하나, 그것은 우리 모두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다보니 정당을 지키기 위해 오히려 나의 소신에 침묵하는 결과가 발생한다. 미국인의 80%는 부자증세에 찬성하고 69%는 임신중지 합법화에 찬성하지만, 이는 부차적 문제가 된다.
오히려 선거는 다수결로 정할 수 없는 주제를 놓고 벌이는 전쟁으로 변질된다. ‘어느 인종이 더 나은가’ ‘어떤 종교가 더 가치 있나’처럼 타협할 수도, 승복할 수도 없는 문제를 놓고 표 싸움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혐오는 정치의 이름으로 사회적 제약에서 자유로워진다. 스탠퍼드대 정치학 교수인 샨토 아이엔가는 “인종과 종교, 젠더처럼 누군가의 정체성을 공격하는 것은 사회적 규범의 제약을 받지만,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압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수단이 목적을 대체할 수 없는 것처럼, 정당이 궁극적인 정체성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서로 다른 배를 타고 왔을지 몰라도 지금은 모두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마틴 루서 킹 의 말처럼 ‘우리 대 그들’의 싸움을 하고 있는 공화당 지지자도 민주당 지지자도, 사실 모두 같은 미국이라는 배에 타고 있지 않은가.
정유진 국제부장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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