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철의 나락 한 알] ‘이재, 곧 죽습니다’
새해, 우리는 한 해를 시작하며 나름의 결심을 한다. 삶이 우리가 하는 크고 작은 여러 선택으로 이루어진다면, 좋은 삶은 결국 좋은 선택에 달렸다. 누구나 좋은 선택을 원한다. 좋은 선택은 당위와 자기 이익이 양립하면 쉽지만 상충하면 어렵다.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군자는 ‘의’를, 소인은 ‘이’를 잣대로 선택한다. ‘의’와 ‘이’가 맞서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면서도 개인의 유불리에 걸려 넘어지는 수가 많다. 지난 연말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꼽은 견리망의(見利忘義)도 ‘이’가 ‘의’를 앞서는 현실을 가리킨다. 안타깝게도 견리망의는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심해진다.
이 대표, 윤 대통령 반면교사 삼길
“멋있게 지면 무슨 소용 있겠어요?” 지난해 11월 말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현행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에서 이전의 ‘병립형 비례대표제’로 돌아가겠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2019년 이후의 민주당 당론이었고 2022년 대선 공약이었다. 대선 후보 이재명은 ‘표의 등가성 보장하는 선거제 개혁’ ‘비례대표 확대’ ‘비례대표제 왜곡하는 위성정당 금지’ 등 거대 양당의 기득권을 타파할 정치개혁 공약을 제시하고 정권이 아닌 ‘정치’ 교체를 약속했다. 노회찬이 말한 “50년 동안 썩은 판”을 바꾸겠다는 ‘멋있는’ 공약이었다. 그런데 2년 만에 이재명은 다가오는 총선의 유불리를 잣대로 연동형과 병립형을 놓고 저울질한다.
이재명 대표는 윤석열 대통령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지난해 12월 말 ‘김건희’와 ‘대장동 50억 클럽’ 특검법, 이른바 ‘쌍특검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윤 대통령은 법안이 정부로 이송되자 바로 재의요구권을 행사해 국회로 돌려보냈다. 지난 대선 때 윤석열 후보는 특검 거부에 관한 자신의 소신을 피력했다. “특검을 왜 거부합니까? 죄지었으니까 거부하는 겁니다.” 그리고 2년 만에 윤 대통령은 자기 배우자의 유불리를 잣대로 주판알을 튕겼다. 전형적인 소인의 행태다. 이재명은 선택해야 한다. 견리망의인가, 견리사의(見利思義)인가?
얼마 전 <이재, 곧 죽습니다>라는 드라마를 봤다. 주인공 ‘이재’가 12번의 죽음을 겪으면서 그때마다 다른 삶이 물고 물리며 이야기가 펼쳐진다. ‘곧 죽습니다’라는 제목을 보니 우리가 삶에서 종종 부딪치는 중요한 선택과 죽음의 관계가 떠올랐다. 가톨릭교회에서 널리 알려진 피정 안내서로 예수회를 창립한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쓴 <영신수련>이란 책자가 있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의 ‘선택을 위한 길잡이’에서 선택을 잘하려면 마음의 눈이 맑아야 한다고 강조한 후 좋은 선택을 하는 방법으로 ‘죽음의 상상’을 제안한다. 결정하기 어려운 중대한 선택일 경우, 지금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상상하고 그때 했을 선택을 바로 지금 하라는 것이다. 이제 곧 죽는데 이익이 무슨 소용인가, 죽을 때 후회할 선택은 하지 말라, 이런 뜻이다. 본래의 삶을 살려면 ‘인간은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직시하라고 했던 마르틴 하이데거,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함정을 벗어나는 최고의 길이라 했던 스티브 잡스, 모두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죽음의 상상은 좋은 선택의 관건인 자기 이익에서 멀어지는 데 효과가 뛰어나다.
대의명분 앞에 무엇을 망설이나
이재명의 마음은 연동형 고수와 병립형 회귀 사이에서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널뛰기할 것이다. 마음의 눈이 맑지 않다는 신호다. 이냐시오는 이런 때 이전의 선택을 절대 변경하지 말고 고수하라 권고한다. 모의실험 결과 총선에서 병립형 비례제가 민주당에 유리하다고 한다. 그러나 국민에게 한 약속을 저버리고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무신불립(無信不立), 정치인은 국민 신뢰 없이 설 수 없다. 선거제 선택은 이번 총선보다 다음 대선에 더 큰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그래도 총선에서 지면 어쩌나 걱정된다면 지난 총선에서 얻은 180석으로 무얼 했는지 반성부터 해야 한다. 의석수도 중요하지만, 대의명분과 국민 신뢰는 더 중요하다. 민주당이 다수 의석으로 밀어붙인 ‘검수완박’과 ‘공수처’가 지금 어떤 꼴인지 보라. 총선 결과에 상관없이 국민의힘도 다음 대선을 의식하는 한 제멋대로 하지 못한다. 연동형 비례제로 거대 양당 독식 체제를 깨고 다당제의 기틀을 놓는 것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질적으로 바꾸는 일이다. 이 대의명분 앞에서 무얼 망설이나?
이렇게 얘기해도 눈앞의 유불리에 좌고우면하는 걸 보면 <이재, 곧 죽습니다>에서 ‘죽음’ 역을 맡은 박소담의 말이 자꾸 떠오른다. “꼭 인간들은 죽은 후에 살려고 발버둥 친단 말이야. 살았을 때 그렇게 좀 살지 그랬어.” 올해는 “그렇게 좀” 사는 사람이 많았으면, 견리사의의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조현철 신부·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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