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시상식, 모두의 축제가 되려면

노지민 기자 2024. 1. 1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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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의 여자 신인상 수상이 보여준 유의미한 변화
여전히 성차별적인 사회, 다양한 의제 발굴 나서야

[미디어오늘 노지민 기자]

지난해 연말 트랜스젠더 여성 풍자(분명 윤보미)의 '2023 MBC 방송연예대상' 여자 신인상 수상은 한국 방송가의 고질적 성소수자 배제를 넘어선 전향적 변화라 환영 받았다. 풍자는 수상 소감을 통해 “내가 남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걱정하시는 아버지에게 사랑 받고 인정 받고 있다는 모습 보여드리고 싶다”고 말하며 눈물을 보였다. 이는 성소수자들이 존재 자체로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했다.

24년 전 커밍아웃한 홍석천씨는 <메리퀴어> MC로서 '제2회 청룡시리즈어워즈' 남자 예능인상 후보에 올랐다. 커밍아웃 이후 방송 프로그램 출연이 중단되고 2013년까지 지상파 드라마에 출연하지 못했던 그는 데뷔 30년 만인 지난해 처음 연말 시상식에 참석했다. 홍석천씨는 “(부모님)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이라도 멋진 시상식 자리에 선 아들 모습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드디어 그 소원을 이루게 됐다”고 했다.

'2023 MBC 가요대제전'에서는 래퍼 이영지씨와 아이돌 아이브(IVE) 멤버 안유진씨가 레이디 가가(Lady Gaga)의 '본 디스 웨이'(Born This Way)를 열창했다. 그보다 한 해 전 서울시가 주최한 보신각 타종 행사 공연에서 삭제됐던 “게이, 이성애자, 양성애자,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상관 없어. 난 옳은 길을 가고 있어. 난 살아남기 위해 태어났어(No matter gay, straight, or bi, lesbian, transgender life. I'm on the right track baby. I was born to survive.)” 등 가사도 온전히 방송됐다.

여성인 풍자의 여자 신인상 수상, 게이 홍석천씨의 시상식 참석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의미를 조명한 언론의 보도 역시 권장돼야 할 변화들이다. 다만 소위 '여풍' 보도처럼 극소수의 성공 사례를 과도하게 부각해 성차별이 여전한 사회적 현실을 가려선 안 된다는 우려도 있다. 예컨대 <'청룡' 홍석천·'신인상' 풍자, 방송계 성소수 바람>과 같은 제목 등이다. 성소수자 수상을 '이색 수상'사례 등으로 규정하는 표현도 자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여성학협동과정 부교수는 기자협회보 칼럼 <성소수자 보도,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이벤트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할 경우, 실제 현실은 변화하지 않는데 특정 개인의 성공을 부각하여 일종의 자기계발을 강조하는 게 될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소수자의 현실에 대한 잘못된 인상을 전달할 수도 있다”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상징적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 역시 언론의 책임을 다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우선은 성소수자가 미디어 재현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 자체가 출발점이 된다는 점, 그래서 이번 수상과 같은 이벤트의 의미를 놓치지 않고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해외 사례로는 주요 시상식의 남녀 이분법적 성별 구분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전해지곤 한다. 지난해 뮤지컬 '앤 줄리엣'(&Juliet)에 출연한 배우 데이비드 설리번은 뮤지컬계 권위 있는 시상식인 '토니상' 후보군에 올랐지만 “나는 논 바이너리(non-binary: 이분법적으로 구분된 성별에 속하지 않는 성정체성)이고 뮤지컬에서 논바이너리 주연을 맡고 있다”며 “업계 전반에 걸쳐 시상식이 범위를 확장해 모든 성 정체성의 사람들을 기리고 상을 수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넷플릭스 시리즈 '더 크라운'(The Crown)에서 연기한 배우 엠마 코린은 BBC 인터뷰에서 “내가 논바이너리 정체성을 갖고 여성 부문에 지명되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밝힌 바 있다.

2008년 내셔널 텔레비전 어워즈, 2017년 MTV 영화&TV 시상식, 2021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 등이 연기 부문의 성별 구분을 없앴다. 대중음악 분야 시상식에선 2012년 그래미 어워즈, 2022년 브릿 어워즈 등이 일부 부문의 성별 구분을 폐지한 바 있다. 동시에 2018년 성별 구분 없이 두 명의 연기자에게 시상하기로 한 제프 어워즈 수상자가 남성에 치우친 사례처럼 현실의 성별 불균형과 차별이 여전하다는 문제의식도 전해지고 있다.

▲두 사람이 각각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모습. 기사와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이미지.ⓒpexels

손희정 문화평론가는 “한국에서의 논의 단계는 남녀 시상을 없애자는 것까지 가기 전 단계라 생각한다”라며 “예능이건 영화판이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여성은 열세이고 작품 수나 퀄리티도 그렇다. 그걸 놓고 경쟁하라는 건 정당한 경쟁 구조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해외에선 워낙에 논바이너리 커밍아웃이 많다. 특히 스탠딩 코미디 같은 경우 소수자들이 목소리를 내고 전유할 수 있는 공간이다 보니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며 사회문화적 환경과 배경의 차이를 언급했다.

손 평론가는 “풍자는 다변화된 미디어 환경에서 등장해 진입장벽이 높은 보수성이 있었던 공간으로 진출했다. '동료 시민' 얼굴이 확장돼 '그들만의 잔치'가 확장된 의미가 있다”며 “홍석천씨는 반은 아웃팅을 당한 것처럼 커밍아웃을 하고 너무 오래 고생을 했는데 지금은 자기 정체성을 '셀링 포인트' 삼아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는 연예인이 됐다. 사회가 변하기 전에 그 사람들이 한계를 어떻게 돌파해왔는지 사회는 어떻게 부응하고 있는지” 주목할 수 있을 것이라 제안했다.

성상민 문화평론가도 “풍자는 온라인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지상파, 케이블 등을 가리지 않고 나오게 됐다. 처음부터 지상파를 통해 데뷔했으면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시상식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기본적인 방송 제작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이미 다양한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방송은 이를 얼마나 잘 대변하고 있는지 최소한의 노력과 실천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성 평론가는 또 “방송사들이 시사교양 부문에서 하는 이야기가 시사교양국을 넘어가는 순간 사라진다”며 “PD협회나 기자협회가 됐건, 한국방송작가협회 같은 유관 단체가 됐건, 아니면 노동조합이 됐건 실제 현업에서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이 이런 것을 고려하고 있음을 말해야 한다”고 했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지상파 방송사에서 MTF(Male To Female: 남성에서 여성으로 정체화)를 여성으로 인정했다는 건 굉장히 옳은 판단”이라며 “(수상자) 성별을 남녀로 구분하지 않되 특정 성별이 60% 넘는 것은 방지한다는 내부 규정을 세우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아울러 황 평론가는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TV 자체도 '원 오브 뎀'(One of them)이 됐다. TV는 원래 굉장히 유니버셜(universal)한 매체인데 지금처럼 가면 전혀 유니버셜하지 않게 될 것”이라며 “'70년대생 남성'으로 상징되는, 과대표되는 특정 성별과 세대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수아 교수는 앞선 칼럼에서 “언론 보도에서 성소수자는 퀴어문화축제나 차별금지법 논의 등에서 성소수자 혐오가 주제가 될 때 주로 재현되어 온 한계가 있다”며 “언론이 사회적 혐오를 개선하기 위한 미디어의 역할을 고려하면서 어떻게 성소수자 관련 보도를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본격적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출발점으로 보다 다양한 성소수자 당사자들의 정치, 문화, 경제 활동에 대한 의제 발굴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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