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한의 토포필리아] 공원, 기억으로 산책하기

한겨레 2024. 1. 14.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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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작전처럼 180일 만에 조성한 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 사진은 1973년 5월5일 개원일 장면. 서울기록원 서울사진아카이브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공원의 위로’ 저자

침묵은 겨울의 켤레다. 겨울은 소란한 도시의 일상에 잠시 침묵을 허락한다. 올리비아 랭의 ‘외로운 도시’ 같은 책을 친구 삼으면 침묵의 계절이 소리를 내며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가끔은 털모자 눌러 쓰고 추운 도시를 가로질러 공원을 걸어 보자. 침묵이 스며든 땅, 겨울 공원에서는 침묵을 호흡할 수 있다. 갈색 풍경의 고독한 질감이 비밀을 누설한다. 봄의 역동을 기다리며 고요히 연대 맺은 비인간 생명체들이 말을 걸어온다.

다음 걸음을 내디딜 수 없을 만큼 세찬 바람이 부는 날에는, 마음마저 얼어붙게 하는 한파가 닥치는 날에는, 기억과 상상으로 공원을 산책하면 된다. 책상 서랍 속에서, 스마트폰 폴더에서 잠자는 사진들을 꺼내면 작지만 눈부신 공원의 기억이 위로를 안겨준다. 이번 겨울에는 나만의 그때 그 공원을 넘어 우리와 공원, 도시와 공원의 기억을 톺아보게 하는 전시회가 많이 열리고 있다.

‘이경준 사진전-원 스텝 어웨이.’ 공원 사진을 관람하는 사람보다 공원 사진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사람이 더 많다. 사진 배정한

전시플랫폼 그라운드시소 센트럴의 개관전인 ‘이경준 사진전: 원 스텝 어웨이’에는 도시의 일상과 공원 풍경이 빼곡하게 펼쳐져 있다. 뉴욕 기반의 사진작가 이경준은 도시의 익숙한 풍경을 멀찍이 떨어진 낯선 앵글로 포착한다. 갑갑할 정도로 엄격하게 수평과 수직의 직각 패턴을 강조한 도시경관 사진들을 통과하고 나면, 센트럴파크의 여유를 조감한 사진들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대형사진 속 공원에 점처럼 뿌려진 사람들의 표정은 읽히지 않지만 그들의 몸짓만으로도 공원이 주는 위로가 전달된다. 공원 사진들 앞이 유독 관람객들로 북적이는데, 사진을 감상하거나 사진 속 공원을 보는 사람보다는 공원 사진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사람과 그들을 다시 피사체 삼는 사람이 더 많다.

사진은 가장 쉽게 기억을 소환하는 매개물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의 특별전 ‘그때 그 서울: 1945~1965’에서는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자 한국전쟁 종군기자인 임인식이 기증한 흑백사진 1003점 중 일부를 만날 수 있다. 1950년대 서울 항공사진들도 흥미롭지만, 나의 시선을 가장 오래 멈추게 한 건 고궁과 한강 사진들이다. 남산공원이나 삼청공원 같은 산지형 공원 외에는 변변한 도시공원이 거의 없던 시절, 고궁은 시민의 소중한 휴식처였다. 사진에 담긴 창경원 벚꽃놀이, 경복궁 사생대회, 덕수궁 소풍 장면은 한국 공원문화사의 중요한 한 챕터가 아닐 수 없다. 해수욕장을 연상시키는 뚝섬 유원지 백사장 풍경과 얼음낚시와 스케이트를 즐기는 서빙고 일대 한강 풍경은 요즘 한강공원보다 훨씬 역동적이다.

종군기자 임인식 기증 특별전 ‘그때 그 서울, 1945~1965’ 포스터. 해수욕장을 연상케 하는 한강 백사장이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 포스터

서울기록원에서 열리고 있는 아카이브전시 ‘기록으로 산책하기, 서울의 공원’은 사진뿐만 아니라 여러 행정문서, 기록물, 도면, 영상으로 서울의 공원 변천사를 살핀다. 1부 ‘서울의 공원이 걸어온 길’은 일제강점기, 1960~80년대 경제성장기, 1990년대 지방자치시대 서울시 공원정책의 변화를 개괄한다. 2부 ‘기록으로 만나는 공원’에서는 남산공원, 효창공원, 서울대공원, 북서울꿈의숲, 서울숲, 월드컵공원 등 대표 공원들의 변천사와 숨겨진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3부 ‘키워드로 알아보는 공원 기록’은 어린이, 생태, 도시재생 등 공원의 다양한 가치를 되짚어보게 한다. 어린이대공원, 여의도샛강생태공원, 선유도공원의 옛 기록과 사진을 보면서 짧지만 묵직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 전시규모가 작고 구성과 콘텐츠가 평면적이라 아쉽다면, 서울기록원의 디지털아카이브를 뒤져 더 많은 공원 기억을 호출할 수 있다.

군사작전처럼 180일 만에 조성한 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 사진은 1973년 5월5일 개원일 장면. 서울기록원 서울사진아카이브

발굴, 저장, 소통을 통해 기록과 기억의 접면을 넓히는 공원아카이브와 전시가 부쩍 활발하다. 그 기점은 2020년 도시경관연구회 보라가 주도한 ‘우리의 공원’이라고 볼 수 있다. 이 프로젝트의 성과로 그해 가을 서울식물원에서 ‘공공의 기억을 재생하다, 남산식물원’ 전시가 열렸고, 온라인 전시 ‘공원의 기록을 발굴하다, 남산공원과 월드컵공원’도 진행됐다. 당시 프로젝트에 참여한 박희성(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연구교수)의 말처럼, “기록은 기록하는 자의 산물이다. 기록의 불완전함과 왜곡을 피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기록의 집적물이자 저장소인 아카이브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게 하고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진정성에 기반을 둔 두터운 스토리텔링을 구축할 수 있는 토대이며, 과거와 미래와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로서도 힘을 갖는다.”

먼지 쌓인 창고에 방치된 공공기록과 개인의 작은 서랍에 묻힌 빛바랜 사진에 힘입어 우리는 기억과 상상으로 재구성된 공원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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