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서사 가득한 기증관이라니…국보·보물까지 1671점 공개 [요즘 전시]
밖으로 나온 세한도·수월관음도
기증자 이름 딴 공간 탈피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2020년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 씨 기증으로 큰 화제를 모았던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3년 만에 공개됐다. 윤동한 한국콜마홀딩스 회장이 기증한 고려 불화의 백미인 ‘수월관음도’도 6년 만에 관람할 수 있게 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리뉴얼한 기증관을 열면서 그동안 만날 수 없었던 국보와 보물도 전시장을 대거 찾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이 2년 만에 새롭게 개편한 기증관을 열었다. 지난해 12월 문 연 ‘기증 오리엔테이션 공간’을 잇는 공간으로, 전시 면적만 644평에 달한다. 이번 전시에는 국보와 보물을 포함한 1671점의 기증품이 한자리에 모였다. 개편 전 전시에 공개된 기증품 기증자 수는 20여명에 불과했지만, 개편 후에는 그 수가 114명으로 6배가량 뛰었다.
무엇보다 가장 매혹적인 기증관의 특징은 흥미진진한 서사가 가득한 공간, 그 자체다.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 기증관은 4000여점의 문화유산을 기증자의 이름을 따 구분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새로 개편된 기증관은 박물관의 소장품이 된 기증품을 다양한 주제로 펼쳐 보이는 공간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박물관이 가진 태생적인 권위를 털어내고 관람객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한 획기적인 변화다.
윤성용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지금의 기증관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로 바뀌었다”며 “우리 시각이 아닌 외부 시각에서 기증관을 어떻게 바꿀까 연구했다. 담당자는 기증하신 분들을 일일이 찾아뵙고 설명하고, 설득하고, 동의를 받아야 했다”고 말했다.
실제 ‘기증Ⅰ’실에 들어서면 천장에 닿을 듯 높은 선반에 가득 찬 수십여점의 기증품이 시야를 압도해 온다. ‘기증Ⅱ’실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국외로 반출된 문화유산을 수집해 지켜낸 이들의 기증품이 꽉 찬 선반이 한 벽면을 차지했다. 소장가의 서재에 있던 문화유산이 박물관에 기증되기까지, 나눔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메시지가 시각적으로 구현된 순간이다. 서재에 배치된 기증품 종류만 해도 토기, 도자기, 금속공예, 목가구, 서화 등 다채롭다. 서로 다른 조형성과 미감을 가진 문화유산을 회랑식 통로 좌우로 배치해 색다른 매력을 한눈에 비교 가능하도록 전시한 ‘기증Ⅲ’실 공간도 색다르다.
우선 기증관 재개관을 기념해 1844년 추사 김정희가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제주 이상적에게 그려준 국보 세한도, 2016년 일본의 소장가로부터 수십억원에 사들여 박물관에 기증된 수월관음도가 5월 5일까지 특별 공개된다. 국보로 지정된 송성문 기증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제15’와 보물로 지정된 이홍근 기증 ‘분청사기 상감 연꽃 넝쿨무늬병’·이근형 기증 ‘이항복필 천자문’ 등 국가지정문화유산도 볼 수 있다.
전시관에는 손기정 선생이 기증한 보물 ‘청동 투구’와 함께, 기증 관련 이야기도 만날 수 있다. 기원 전 6세기 무렵 그리스에서 만들어진 청동 투구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주기로 한 우승 부상이었지만, 올림픽 선수가 너무 비싸고 귀한 기념품을 받으면 안 된다는 올림픽 규칙에 따라 손기정 선생에게 끝내 전달되지 않았다. 손기정 선생의 반환 노력 끝에 50년이 지난 1986년, 베를린 박물관에 보관된 그리스 청동 투구를 돌려받게 됐고, 그는 이를 1994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당시 손기정 선생은 “이 청동 투구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라고 말했다.
기증품과 어우러져 적절하게 배치된 투명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패널도 세련된 전시 구성에 힘을 보탠다. 특히 ‘기증Ⅳ’실 화가 김종학이 그린 설악의 설경과 들꽃이 영상 매체로 재해석돼 그가 기증한 목가구의 배경으로 쓰인 공간은 마치 고즈넉한 한옥집 안에 있는 듯 입체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한편 전시실 입구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안내 패널과 음성 안내를 받을 수 있는 QR코드가 설치돼 있다. 휴게 공간 곳곳에는 쉬운 설명 책자가 배치돼 있으며, 직접 만져볼 수 있는 촉각체험물도 설치돼 있다. 무료 전시.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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