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막으려 미국에서 귀국했어요”…대만, 민주주의 선택했다 [르포]

2024. 1. 14.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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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칭더 40.05%로 당선
中압박이 역풍으로 작용
14일 타오위안 국제공항 출국장이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꽉 차 있다. 이날 인파가 몰린 것은 전날 치러진 대만 총통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입국 했던 대만인들이 출국길에 올랐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김진호 명예기자]
14일 오전 대만 타오위안 국제공항에는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미국 뉴욕으로 돌아간다는 유학생 린구이웨이씨는 전날 투표를 마치고 바로 대학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에 나왔다고 밝혔다. 그녀가 16시간짜리 비행기를 탄 것은 총통 선거 때문이다. “작년 미국에서조차 중국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학기중이지만 꼭 투표를 해야겠다며 친구들끼리 SNS에서 약속했어요. 대만인의 정체성을 지켜줄 사람을 뽑기 위해서요.”

13일 저녁 8시 30분(현지시간) 타이베이시 베이핑둥루에 위치한 민진당 선거본부 앞에는 린씨를 비롯한 수많은 시민들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2030뿐만 아니라 중장년층도 녹색옷을 입고 민진당 깃발을 흔들고 있는 게 눈에 띄였다. 선거본부는 가수·유명인사들이 모여 선거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축제장이 돼 있었다.

김진호 매경 명예기자가 13일 저녁 전 세계 150개 언론과 함께 타이페이 민진당 선거본부에서 라이칭더 당선인의 수락 연설을 듣고 있다. [김진호 명예기자]
하지만 선거본부 안에서 라이칭더 총통 당선인과 샤오메이친 부총통 당선인이 당선 수락 연설을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민진당이 마냥 축제 분위기만은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이날 치러진 대만 총통 선거에서 라이칭더 당선인은 558만표(득표율 40.05%)를 거둬 승리했다. 4년전 민진당의 차이잉원 현 총통과 함께 부통령으로 선거를 뛰었던 라이칭더 당선인은 당시 800만표를 얻어 역대 총선 최다 득표로 승리를 거뒀는데, 그에 비하면 국민들의 지지가 크게 떨어졌다.

민진당은 같은 날 치러진 총선에서도 국회 의석(113석) 가운데 52석을 차지해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뒤를 이어 국민당(51석)이 바짝 쫓아오면서 3당인 민중당(8석)이 캐스팅보트를 쥐게 된 상황이다. 친중 후보 당선을 위한 중국 당국의 군사적 위협과 경제적 압박이 대만 유권자들의 반발을 산 것으로 풀이된다.

친미·독립, 대만 첫 3연속 집권…‘경제안보’ 통했다
라이칭더 민진당 후보가 13일 제16대 대만 총통 선거에서 승리한 뒤 타이베이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해 지지자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로이터 = 연합뉴스]
지난 13일 치러진 대만 총통·입법위원 선거는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간의 대결로 2024년 아시아 민주주의에 큰 의미를 지닌다. 이날 대만 선거를 시작으로 다음달 인도네시아 대선, 4월 한국 총선, 6월 몽골에 이어 일본도 9월 이전에 줄줄이 선거를 치러야하기 때문이다.

라이칭더 당선인은 타이베이의 선거 캠프에서 가진 당선 기자회견에서 “지구촌 첫 대선서 대만이 민주진영 첫 번째 승리를 가져왔다”며 “대만이 전세계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에서 계속 민주주의의 편에 서기로 결정했다. 대만이 계속해서 국제 민주주의 동맹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라고 했다. 특히 이번 대만 총선 결과는 대만 국민들이 아시아에서 가장 활기찬 민주주의 국가 중 하나임을 보여줬으며, 미중갈등·경제부진·2030을 위한 공약 등 비슷한 고민을 안고 4월 총선을 치러야하는 한국 국민들에게도 다양한 시사점을 던진다.

민진당 승리의 가장 큰 공신은 현 차이잉원 총통·라이칭더 부총통 정부의 ‘경제안보’전략이다. 라이칭더 당선자는 선거과정에서 녹색 경제, 신재생 에너지, 친기업적 환경과 인재교육을 꾸준히 강조해왔다.

라이칭더 당선자는 기자회견에서 “대만의 반도체 환경을 만들어 국제시장과 바로 연결되는 구조를 만들겠다”며 민진당의 경제안보 전략인…반도체 방패‘를 강조했다. 이른바 중국의 압박이 날로 거세지고 있지만 TSMC를 비롯한 반도체 공급망을 방패삼아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청년들에게 좌절감을 주고 있는 경제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미다.

그는 “이런 과제를 이루기 위해 우수한 교육환경을 만들고 지역 연계적 산학협력을 하겠다”고 강조했다. 광부였던 아버지를 2살때 여의고 힘겹게 살아왔던 그는 자신의 어려웠던 학창 시절을 생각하며 학생들에 대한 지원과 국가발전을 위한 인재 양성을 강조해 젊은층의 지지를 얻어냈다. 특히 청년 주택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을 내놓은 것도 선거 유세 과정에서 청년층의 요구를 수용한 내용이다.

민진당은 또 미중갈등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안정감’을 주겠다는 점을 강조했다. 라이칭더 당선인은 당선 기자회견에서 “중국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으며 안보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면서도 미국·중국이라는 말로 국민을 자극하거나 분열시키는 것은 피했다.

이번 대만 선거가 친미 성향의 민진당·친중 성향의 국민당간의 선거로 보이긴 하지만 실제 여론조사에서는 국민 90%이상이 양안관계에서 ‘현상유지(status quo)‘를 원한다고 답했다. 안정적인 정부를 원하는 국민들의 정서를 잘 대변한 것이다. 대만 국민은 1996년 직선제 도입 후 2000년부터 민진당과 국민당 정권을 8년 주기로 교체하며 심판해왔다.

그러나 이번에 민진당이 처음으로 이런 공식을 깨고 3연속, 총 12년 연속 집권에 성공한 것도 민진당이 민진당이 중국의 압박이 강해지는 상황에서 미국과 관계를 적극 활용해 안정적 관리를 해왔기 때문이다. 민진당은 그러나 대선과 같이 실시된 입법위원(국회의원) 선거에서 113석 중 과반을 확보하지 못해 국정운영에 부담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민진당이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대만인의 감성과 자부심을 심어준 것은 중국의 압박으로부터 유권자들의 마음을 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중국은 총통 선거를 나흘 앞둔 지난 9일 대만산 농수산물, 기계류, 자동차 부품, 섬유 등에 대한 관세 감면을 중단하는 추가 조치를 검토하고 있다며 경제압박을 가했다. 특히 지난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미중 정상회담이 이뤄진 이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통일 당위론’을 강조했고, 군사적으로도 대만에 압박수위를 높였다.

하지만 집권 민진당은 그럴때마다 대만인의 감성과 자부심을 적절히 자극하면서 ‘귀국 투표’를 자극했다. 대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유권자 등록을 마친 재외 대만인은 4000여 명으로 전체 1954만 유권자에 비하면 작은 수치이지만 전체 유권자들에 대한 민주주의 열망을 부추긴 것으로 풀이된다.

국민당의 경우 중국과의 관계를 평등한 관계보다는 대만의 중국에 대한 의존성을 높이며 미국에 대한 적절한 외교 전략을 내놓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국내 선거에서 악재로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선거본부에서 만날 수 있는 노년층과 장년층 선거 운동원 중에는 젊음을 찾을 수 없었다. 노령화되는 정당의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이번 민진당 승리에서 주목해볼만한 것은 SNS 선거전략이다. 이번 대만 투표 현장은 마을 이장 선거처럼 조용하게 이뤄지고 있었고 어떠한 선거 운동이나 플래카드도 없었다. 선거 운동 과정에서도 도로에 현수막이 적었고, 시끄럽던 거리 유세마저 상대적으로 아주 적었다. 시민들은 선거에 관심이 없는 모습으로 일상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 눈에 띄였다.

그러나 타이페이를 비롯한 지방에서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은 SNS를 통해 지지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다고 밝혔다. 과거 어느 선거보다 조용하게 방송과 인터넷 및 SNS를 통해 조용하고 절도 있게 진행된 선거는 선거 결과에 대해 후보자 모두 인정하는 성숙한 민주주의 선거 모습을 보였다. 특히 이번 대만 선거에서 외신으로 취재에 참여한 기자단은 약 150여 명이었는데, 집권 민진당의 경우 외국어를 잘하는 청년층 선거본부 국제팀이 외국 기자들과 친구가 되는 등 언론 친화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김진호 매경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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