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미국 택했다…격랑 거세지는 양안
'反中' 내세운 라이칭더 당선
中 잇단 군사·경제 압박에도
"대만 국민 선택은 민주주의"
◆ 대만은 美 택했다 ◆
14일 오전 대만 타오위안국제공항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미국 뉴욕으로 돌아간다는 유학생 린구이웨이 씨는 전날 투표를 마치고 바로 대학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에 나왔다고 밝혔다. 그가 16시간짜리 비행기를 탄 것은 총통 선거 때문이다. "지난해 미국에서조차 중국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학기 중이지만 꼭 투표를 하자고 친구들끼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약속했어요. 대만인의 정체성을 지켜줄 사람을 뽑기 위해서요."
13일 오후 8시 30분(현지시간) 타이베이시 베이핑둥루에 위치한 민진당 선거본부 앞에는 린씨를 비롯한 수많은 시민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20·30세대뿐만 아니라 중장년층도 녹색 옷을 입고 민진당 깃발을 흔드는 게 눈에 띄었다. 선거본부는 가수·유명인사들이 모여 선거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축제의 장이 돼 있었다.
하지만 선거본부 안에서 라이칭더 총통 당선인과 샤오메이친 부총통 당선인이 당선 수락 연설을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민진당이 마냥 축제 분위기만은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이날 치러진 대만 총통 선거에서 라이칭더 당선인은 558만표(득표율 40.05%)를 거둬 승리했다. 4년 전 민진당의 차이잉원 현 총통과 함께 부통령으로 선거를 뛰었던 라이칭더 당선인은 당시 800만표를 얻어 역대 총선 최다 득표로 승리를 거뒀는데, 그에 비하면 국민들 지지가 크게 떨어졌다.
민진당은 같은 날 치러진 총선에서도 전체 국회 의석(113석) 가운데 51석을 확보하는 데 그쳐 국민당(52석)에 뒤졌다. 양당이 모두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면서 3당인 민중당(8석)이 캐스팅보트를 쥐게 된 상황이다. 친중 후보 당선을 위한 중국 당국의 군사적 위협과 경제적 압박이 대만 유권자들의 반발을 산 것으로 풀이된다.
민진당, 대만 첫 3연속 집권 …'경제안보' 통했다
中 압박속 美와 경제협력 개선 '반도체 방패' 전략 일등공신
불필요한 정치적 갈등 피하며 안정적 정부 원하는 민심 반영
의회 과반의석 확보는 실패 줄어든 지지율 극복은 과제
지난 13일 치러진 대만 총통·입법위원 선거는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대결로 2024년 아시아 민주주의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날 대만 선거를 시작으로 다음달 인도네시아 대선, 4월 한국 총선이 치러지고 6월 몽골에 이어 일본도 9월 이전에 선거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라이칭더 대만 총통 당선인은 타이베이 선거캠프에서 가진 당선 기자회견에서 "지구촌 첫 대선에서 대만이 민주진영 첫 번째 승리를 가져왔다"며 "대만이 전 세계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에서 계속 민주주의 편에 서기로 결정했다. 대만이 계속해서 국제 민주주의 동맹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번 총선 결과는 대만 국민이 아시아에서 가장 활기찬 민주주의 국가 중 하나임을 보여줬으며 미·중 갈등, 경제 부진, 2030을 위한 공약 등 비슷한 고민을 안고 4월 총선을 치러야 하는 한국 국민에게도 다양한 시사점을 던진다.
대만 민주진보당(민진당) 승리의 가장 큰 공신은 현 차이잉원 총통·라이칭더 부총통 정부의 '경제안보' 전략이다. 라이 당선인은 선거 과정에서 녹색경제, 신재생에너지, 친기업적 환경과 인재 교육을 꾸준히 강조해왔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대만의 반도체 환경을 만들어 국제시장과 바로 연결되는 구조를 만들겠다"며 민진당의 경제안보 전략인 '반도체 방패'를 강조했다. 중국의 압박이 날로 거세지고 있지만 TSMC를 비롯한 반도체 공급망을 방패 삼아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청년들에게 좌절감을 주고 있는 경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미다.
라이 당선인은 "이런 과제를 이루기 위해 우수한 교육환경을 만들고 지역 연계적 산학협력을 하겠다"고 강조했다. 광부였던 아버지를 두 살 때 여의고 힘겹게 살아왔던 그는 어려웠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학생들에 대한 지원과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 양성을 강조해 젊은 층의 지지를 얻었다.
또 민진당은 미·중 갈등 상황에서 국민에게 '안정감'을 주겠다는 점을 강조했다. 라이 당선인은 당선 기자회견에서 "중국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으며 안보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면서도 미국·중국이라는 말로 국민을 자극해 분열되는 것을 피했다.
이번 대만 선거가 친미 성향의 민진당과 친중 성향의 국민당의 선거로 보이긴 하지만, 실제 여론조사에서는 국민 90% 이상이 양안관계에서 '현상 유지(status quo)'를 원한다고 답했다. 안정적인 정부를 원하는 국민의 정서를 잘 대변한 것이다.
대만 국민은 1996년 직선제 도입 후 2000년부터 민진당과 국민당 정권을 8년 주기로 교체하며 심판해왔다. 그러나 이번에 민진당이 처음으로 이런 공식을 깨고 세 번 연속, 총 12년 연속 집권에 성공한 것도 민진당이 중국의 압박이 강해지는 상황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적극 활용해 안정적으로 관리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진당은 대선과 같이 실시된 입법위원(국회의원) 선거에서 113석 중 과반을 확보하지 못해 국정 운영에 대한 부담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민진당이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대만인의 감성과 자부심을 심어준 것은 중국의 압박으로부터 유권자의 마음을 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중국은 총통 선거를 나흘 앞둔 지난 9일 대만산 농수산물, 기계류, 자동차 부품, 섬유 등에 대한 관세 감면을 중단하는 추가 조치를 검토하고 있다며 경제적 압박을 가했다. 하지만 집권 민진당은 그럴 때마다 대만인의 감성과 자부심을 적절히 자극하면서 '귀국 투표'를 독려했다. 대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유권자 등록을 마친 재외 대만인은 4000여 명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민진당 승리에서 주목해 볼 만한 것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선거 전략이다. 이번 대만 투표 현장은 마을 이장 선거처럼 조용하게 이뤄지고 있었고 어떠한 선거운동이나 플래카드도 없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도 도로에 걸린 현수막이 적었고, 시끄럽던 거리 유세 활동마저 상대적으로 아주 적었다. 시민들은 선거에 관심이 없는 모습으로 일상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김진호 매경 명예기자 단국대 교수(현 대만중앙연구원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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