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 갔다가 '독도 수호'...제주해녀 공적, 70년 만에 재평가

제주방송 신동원 2024. 1. 14.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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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의용수비대 기념관에 '제주해녀관' 설치
1950년대 독도 머물며 경제활동 '실효적 지배'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주역서 '독도 수호'까지
"지금도 계란 안 먹어" "물개와 뒤범벅 돼 작업"
당시 해녀 '독도 원정 물질' 어땠을까 찾아보니
1950년대 말 독도에서 제주시 한림읍 협재리 출신 김공자 해녀가 강치를 안고 있는 모습 (사진 = 경상북도)


경상북도 울릉도에 있는 독도의용수비대 기념관에 올해 안으로 '제주해녀관'이 들어설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제주자치도는 1950년대 수산물 채취를 위해 독도를 찾았던 제주해녀들이 당시 독도의용수비대와 합심해 독도를 수호한 공적을 인정받아 이 같은 사업이 추진된다고 오늘(14일) 밝혔습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홍순칠 대장을 비롯한 33명의 대원이 일제 해방 후인 1953년 4월 20일부터 국립경찰에 수비업무와 장비 전부를 넘길 때까지인 1956년 12월 30일까지 일본의 침탈로부터 대한민국의 영토인 독도를 수호한 의용단체입니다.

이 시기 생업을 위해 독도를 찾은 제주해녀들도 독도의용수비대와 함께 독도 수호에 이바지했다는 설명입니다. 해녀들의 역사는 이들이 당시 독도에서 생활하며 경제활동을 이어가는 등 실효적 지배를 했다는 증거가 되는 셈입니다.

일제강점기 제주 항일 운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던 제주해녀들이 해방 후에도 국토 수호를 위해 활약했다는 평가입니다.

이에 그간 정부 차원의 홍보와 지원이 이뤄지지 않았다가 이들의 공적을 알 수 있는 '제주해녀관'이 정식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제주도는 국가보훈부와의 지속적인 협의를 거쳐 얻어낸 성과라고 자부했습니다.

■ '독도 수호'했던 제주해녀들

제주해녀박물관에서 펴낸 《제주해녀의 재조명》(2011)에 따르면 당시 독도에서 물질을 했던 해녀들의 증언이 나옵니다.

태평양 전쟁 패망으로 식민지 사업이 물 건너간 일본은 이후에도 독도에 대한 야욕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자료에 따르면, 일본해상 보안청 순시함이 일본 깃발을 달고 독도 인근 해역에 자주 출몰했습니다. 심지어 물질을 하는 해녀들 가까이까지 접근해 말을 거는 등의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제주해녀들은 바닷속에서 수산물을 채취하는 고된 작업 속에서도 일본 순시선을 경계하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습니다. 해녀들은 순시선이 다가오면 작업을 멈추고 큰 바위 밑 등으로 몸을 피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953년 당시 19세의 나이로 독도에 갔었던 박옥랑 할머니(한림읍 협재리)는 10여년 전 해녀박물관과의 인터뷰에서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일본 측은 한 치도 독도에 관심을 놓지 않았던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독도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1953년 5월 28일 11시경 일본의 시마네호가 해산물 실험조사를 위해 독도 부근에 들어가 봤더니 약 30명의 한국인들이 독도와 그 수역에서 해산물을 채취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일본 영토인 다케시마에 대한 불법 침입으로 인정, 승무원 9명이 독도에 상륙한 후 한국인 6명에게 체류 이유를 따지고 사진을 찍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 혹독한 환경, 밤마다 우짖은 물개 소리에 고향생각도

당시 독도는 그야말로 사람이 거주하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고 합니다. 독도 동도(東島)엔 의용수비대가 자리를 틀었고, 제주해녀들은 서도(西島)에 머물렀습니다.

해녀들은 서도에 있는 굴속에서 거주했는데, 이 굴속엔 '물골'이라는 음용수가 샘솟았습니다. 독도의 유일한 식수 공급원이었던 물골은 해녀뿐 아니라 의용대원들도 이용했습니다. 용출량이 넉넉하지 않아 물을 아껴야 했다고 합니다.

밤에는 굴속 바닥에 울퉁불퉁한 자갈밭 위에 가마니를 깔고 각지불이나 촛불을 붙여 어둠을 밝히고 미리 준비해 간 담요를 덮어 잠을 청했습니다. 그럼에도 바닷 바람과 습기가 강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자료에 따르면, 해녀들은 낮엔 "물개와 같이 섞여 뒤범벅이 된 채 작업하고 밤에는 물개 우는 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착잡하게 흔들어 놓았다"고 했습니다.

양식이 떨어졌는데 험악한 파도로 식량 공급이 중단되면 고향 제주에서 먹었던 '감저(고구마)'를 그리워했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배가 고파 갈매기 알을 먹기도 했는데 그 비린 맛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지금도 계란을 먹지 않는다는 해녀도 있었습니다.

해녀들은 가끔 수비대원들과 식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홍칠순 수비대장을 '대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은 수비대원들에게 미역을 선물하니 대원들이 크게 기뻐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1950년대 당시엔 전복이나 소라보다 비싸게 팔렸던 미역만 채취했다고 합니다.

당시 독도에 물질을 하러 갔다가 다친 강치를 보고 바다로 옮겨주던 김공자 할머니의 젊을 적 사진이 언론을 통해 보도돼 한 때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김 할머니는 1959년 독도에서 물질을 했습니다.

사진 속 주인공이었던 김공자 할머니(한림읍 협재리)는 10여년 전 해녀박물관과의 인터뷰에서 "(독도)바당(바다) 속은 문들문들한 먹돌(검은 돌), 아니면 바위, 구멍 뚫린 곳에는 늦미역이나 미역들이 잘 나서 바당(바다)이 낯설지 않았다"고 회상했습니다.

한편, 제주자치도는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많은 수의 제주해녀들이 독도 물질에 나선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독도의용수비대가 독도를 지켰던 1953년부터 1956년까지 대략 35명 내외의 제주해녀들이 함께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향후 제주해녀들의 독도 물질 전반에 대한 조사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일제강점기와 1953년도에서 1956년도까지 제주해녀들의 독도 물질 기록을 보면, △1935년 일본 오키섬 어부 조선인 제주해녀 고용 수산물 채취 △1941년) 일본인 상인에 고용된 제주해녀 16명 성게 채취 △1953년 한림읍 협재리 해녀 5명 독도 물질 △1954년 한립음 협재리 해녀 6명 독도 물질 △1956년 구좌읍 하도리 해녀 7명 독도 물질, 서귀포시 보목동 해녀 10명 독도 물질 등이 있습니다. 

JIBS 제주방송 신동원 (dongwon@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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