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전 칼럼] 흉터는 힘이 세다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내 양 눈썹 부위에는 흉터가 있다. 두개 모두 동갑내기 친구가 만든 것인데, 한쪽은 시멘트 쓰레기통 위에서 밀어 떨어뜨려서, 반대쪽은 달리기에서 지자 화가 나 던진 돌에 맞아 생겼다. 예닐곱살배기 때라 그럴 수도 있던 일인데, 어른들은 둘 사이에 살이 꼈다고 수군댔고, 그래서인지 우리는 지금까지도 서먹하다.
최근 야당 당수가 습격당했다. 경동맥을 피해 다행이지만, 그래도 습격당했던 다른 정치인들처럼 그의 목에도 흉터가 생기리라.
조직학적으로 흉터는 손상 부위 회복 과정에서 이루어진 염증 반응, 혈관 생성 등 다양한 생리 현상의 산물이다. 특히 콜라겐 섬유가 불규칙하게 다량 생성되면서 주변 조직과는 다른 형태를 띠어 두드러져 보인다. ‘흉터’는 종종 ‘낙인’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실제로 소나 말 엉덩이, 심지어 죄인 이마에 찍던 낙인도 흉터이고 조직학적으로 이 둘을 구별하기 어렵다. 흉터가 늘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스스로 삶을 내려놨어요.” 조심스레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와 상담을 청한 학생 중엔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흉터가 있는 이가 많다.
흉터가 있다고 다시 상처받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한강의 단편소설 ‘아기 부처’에서 온몸 화상 흉터 때문에 강박적으로 완벽함을 추구하며 살아가던 한 남자처럼, 목덜미 흉터 위로 다시 3센티 자상이 생기고 그 위에 먹피가 맺히기도 한다.
흉터는 흉하다. 그래서 흉터 제거술도 행해진다. 하지만 흉터를 없애기는 어렵다. 그 수술이 또 다른 상처를 내기 때문이다. 흉하지 않은 흉터도 있다. 어릴 적 김씨 아저씨는 술에 얼큰해질 때면 6·25 전쟁 때 총알이 스쳐 생긴 다리 흉터를 자랑스레 내보이곤 했고, 대여섯살 꼬마였던 나는 이순신 장군을 배알하는 눈빛으로 그 흉터를 바라보곤 했다.
흉터는 무언가를 상기시킨다. 대부분 아픔과 연관되지만, 때론 잊지 않겠다던 맹세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상기시킨다. 스님들은 출가할 때 팔뚝에 작은 향을 피운다고 한다. “나 스스로를 태워 중생들을 밝게 비추리라”라는 다짐 의식이다. 그 의식은 팔뚝에 작은 흉터를 남긴다. 이 흉터는 자신이 왜 출가했는지를 상기시킨다.
흉터는 증거다. 실제로 흉터는 상처 회복을 위한 세포들의 분투 증거다.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제자 도마는 예수에게 상처를 보여 달라고 했다. 믿기 위해선 흉터라는 증거가 필요했다. “등에 밤톨만 한 흉터가 있나?” “있어요.” “그럼 맞다 맞아!” 1983년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에서도 몸에 있는 흉터로 가족을 확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야당 당수 목에 남은 흉터도 여전히 조악하고 졸렬한 한국 정치 수준의 증거로 오래 남을 것이다.
흉터는 우리가 누군지를 보여준다. 말과 소에 찍힌 낙인은 주인이 누군지를 보여준다. 가축만이 아니다. 바울은 선교 중 받은 핍박으로 몸에 생긴 상처를 자신이 신의 제자가 된 징표라 자랑했다. 흉터뿐만 아니라 흉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역시 우리가 누군지를 보여준다. 우리에게는 멀쩡한 이들을 ‘화냥년’, ‘혼혈아’, ‘위안부’라 낙인찍고 괴롭혔던 역사가 있다. 한 사람의 상처 앞에서 ‘1센티’이니 ‘2센티’이니 하는 수다도 그런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이다.
흉터는 정직하다. 흉하든 아니든, 고통이든, 자랑이든, 치졸함의 증거이든 우리는 그것을 부인할 수 없다. 흉터는 운세, 허망한 낙관이나 비관보다 실제적이다. 있는 흉터를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그것을 부인하고 전진할 수 없다.
무엇보다 흉터는 힘이 세다. 강요 없이 흉터를 받아들이는 순간, 흉터는 우리에게 넓은 마음, 두번 실패하지 않을 거란 다짐, 그래도 전진해야 한다는 분투의 힘을 준다. 그래서 새로운 출발을 하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흉터에서 시작해야 한다. 조금 더 나가면,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악함이 만들어낸 흉터 위에서, 또한 인류의 공동 번영과 평화를 이루어내려면 며칠 전 9000번째 어린이의 장례식이 진행된 폐허의 가자지구라는 인류의 흉터 위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해 첫달, 오늘은 거울 앞에서 구석구석 내 몸의 다른 흉터를 살펴봐야겠다. 그러면서 상처를 아물게 하려 분투했던 시간과 그때 내 등을 두드려 주었던 이들의 얼굴도 떠올려 볼 테다. 상처가 흉터가 될 사이도 없이 죽어간 이들도 기억해볼 일이다. 한 영화의 대사처럼 신은 우리를 보실 때 승리와 훈장이 아니라 상처와 흉터를 보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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