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좋은 곳으로 시집 보낸 느낌이다"…의사 선생님·마크 테토·송성문 참여한 '기증' [김기자의 문화이야기]
마라토너 손기정도 일본인도 '소유' 아닌 '기증' 결심
"영광스러운 일"…정성껏 수집한 문화유산, 조건 없이 국가에 내주다
"돌아가시기 전에 다 싸서 박물관에 이사시켜놓고 '딸을 좋은 곳에 시집보낸 느낌이다'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며칠 안 되어서 가셨지요."
일제강점기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인술을 베푼 의사인 수정 박병래(1903-1974) 선생의 딸 박노원 씨가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한 말입니다. 박 씨는 "아버지께서 '월급쟁이라서 자잘하게 산 것이 나중에 이렇게 남들에게 호감을 주게 됐다'고 기뻐하셨다"고도 전했습니다.
박병래 선생은 우리 문화 유산을 지키기 위해 열성적으로 도자기를 모은 수집가입니다. 조선 청화백자를 주로 수집해 중요한 우리 청화백자가 온전히 보전할 수 있도록 기여했으며, 1974년에는 평생 모은 도자기 중 무려 375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박 선생이 돌아가신 뒤 박 선생의 부인 최구 여사도 41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작고 귀여우면서도 우아한 미가 살아있는, 기증자의 안목을 꼭 닮은 도자기들을 누구든지 가까이 감상할 수 있도록 정성껏 간추리고 포장해 전달했습니다.
기증이란 자신이 소유한 것을 남에게 주는 일입니다. 개인에서 사회로 문화유산의 가치를 공유하는 고귀한 뜻을 실천한 이들 중에는 외국인들도 있습니다. TV프로그램 '비정상회담'에 출연해 인지도가 높은, 한국을 사랑한 미국인 마크 테토도 그 중에 한 명입니다.
마크 테토는 국립중앙박물관의 YFM 단체(Young Friends of the Museum)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돈을 모아 단체의 기금을 함께 조성했고, 일본 수집가가 가진 고려 시대의 불감을 사들여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한 뒤 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성문종합영어로 유명한 송성문 씨도 지정문화재 다수를 기증했는데요. 송 씨의 기증품 중 국보 1건과 보물 4건 역시 그제(12일)부터 새롭게 단장해 대중에 공개된 국립중앙박물관 2층의 기증관실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기증자는 누가 있고, 기증은 어떻게 하게 됐는지를 알아봅니다.
세계적인 마라톤 선수 손기정은 국립중앙박물관의 기증자입니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하고 그리스 청동 투구를 부상으로 받기로 돼 있었지만 받을 수 없던 손기정은 1986년이 돼서야 돌려받았는데 국가에 이를 기증하기로 결심합니다.
손기정 선수 자신의 투구가 가진 역사적인 의미와 공공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대중은 기증관을 방문하면 그의 그리스 투구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원 이홍근(1900-1981) 선생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혼란기 속에서 사라지는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평생에 걸쳐 문화유산 수집을 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1980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기증한 물품은 1만 202점에 이릅니다.
이 선생과 유족은 당시에 운영한 동원미술관의 콜렉션 전부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기증품도 보물인 분청사기 상감 연꽃 넝쿨무늬병을 포함해 금속, 토기, 석기, 석조물까지 방대한데 그가 수집한 서화는 전체 수집품의 백미로도 불립니다.
이 선생은 문화재는 한 점이라도 사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기증을 하겠다고 의사를 확실히 했고, 이에 이 선생이 돌아가시고 유족들이 고인의 뜻을 받든 것으로 전해집니다. 유족들은 수집품을 하나하나 감싸두고 오동상자 안에 정성껏 보관했습니다.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인 '가보'가 기증되기도 합니다. 이항복이 손수 쓴 천자문과 이항복을 호성공신으로 삼는 교서 등이 그 예시인데요. 임진왜란의 극복에 큰 공을 세운 이항복의 15대 종손인 이근형 선생이 기증했습니다.
성문종합영어로 알려진 송성문 씨가 국보 5점, 보물 21점을 기증했다면 김성용 씨는 2011년에 조선 중기 실학자 이수광이 편집한 지식백과인 지봉유설을 기증했습니다.
치과의사인 박영숙 씨는 화장 도구 등 과거 규방 유산들을 기증했고, 코리아나 회장 유상옥 씨가 기증한 고려 시대 청자 기름병 등 토기들도 우리 문화 유산을 감상할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재를 털어가면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혼란기 속에서도 우리나라의 민족문화재를 지키고자 백방으로 노력한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만큼이나 우리 문화재를 지키려는 다양한 개인들의 노력이 있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주목할 만한 인물은 일본인 내과 의사인 이우치 이사오(1911-1992)입니다. 어린 시절 삼촌으로부터 짐승 얼굴무늬의 기와 선물을 받고 기와에 빠진 이우치는 한국의 와전이 일본 와전의 원류임을 알게 됩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르는 기와와 벽돌을 평생 동안 모아온 그는 이중 1,082점을 1987년 한일 친선을 위해 기증합니다. 한국의 문화유산을 사랑했던 일본인이 소유에 그치지 않고 한국의 박물관을 위해 기증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아쉬움을 넘어서 한일 친선과 양국의 학문을 위해 도움이 된다면 저로서는 매우 만족합니다." 전 시대를 망라하는 한국의 와전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와전의 절반을 고국으로 돌려보내기로 하면서 이우치가 한 말입니다.
유강열(1920-1976) 선생은 1954년 국립박물관 부설 한국조형문화연구소에서 염색과 판화 공방을 맡아 전통 민예를 현대 공예로 발전시키기 위해 힘썼습니다. 현대의 판화나 염색 등의 모티프가 되는 전통 공예 미술품을 그의 소장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삼국 시대의 토기, 조선 시대의 백자와 나전칠기, 민화 등에서 발견한 옛 장인들의 조형 의식을 발견한 유 선생은 실내 디자인 등 현대 조형예술의 발전을 이끌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그의 아틀리에의 모습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재현해 놓았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그동안 기증자 313명이 소장품 5만여 점을 380여 차례 기증했습니다. 박물관의 소장품 43만여 점 중 5만여 점이 기증품인 것입니다.
이 기증자 숫자에는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제(12일)부터 문을 연 국립중앙박물관 기증관에는 기증자 114명의 소장품이 전시돼 있습니다.
이번 기증관 재개관 전시에서는 5월 5일까지 특별 공개되는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 씨가 기증한 국보 '세한도'(歲寒圖·정식 명칭은 '김정희 필 세한도')와 윤동한 한국콜마홀딩스 회장이 기증한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도 관전 포인트입니다.
서화류와 목가구 등은 재질의 특성상 4개월 간격으로 주기적으로 교체될 예정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첫 개인 기증관은 이홍근 선생과 박병래 선생을 기린 동원기념실과 수정기념실로, 1981년에 만들어져 상설 전시가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2005년에 박물관의 부지가 서울 용산구로 이전되면서 기증자의 이름을 딴 기증자실이 다시 운영됐습니다.
이후 기증관의 재방문율을 높이고, 점차 늘어나는 기증품들을 효과적으로 전시할 방법을 찾기 위해 '테마별'로 구성한 기증관이 이번에 새로 꾸려지게 됐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은 단적인 예를 들면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국보 14건과 보물 46건 등 2만 1,600여 점을 기증하면서 대규모로 늘어나게 됐는데요. 이 회장의 기증품도 순회 전시 등이 끝나면 추후 일부 선별해 기증관에서 전시할 예정입니다.
기증을 하면 우대받는 것도 있을까요? 기증자들은 기본적으로 기증서와 기증자 명패를 받습니다. 박물관에 기증자로서 이름이 올라가 전시도 됩니다.
예우가 큰 것은 아닙니다. 무료 주차와 전시 관람에 있어 편의를 제공하는 정도의 혜택을 받게 됩니다.
기증자가 요청하는 경우, 소득 신고 시 '평가 금액'만큼 법정기부금액으로 세제 혜택을 볼 수 있도록 국세청에 신고 가능하도록 처리해준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증자가 이렇게 요청을 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없었다고 국립중앙박물관은 전했습니다.
그만큼 기증자들이 '기증'이라는 숭고한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었고, 소중한 문화유산일수록 모두와 나누어야 한다는 기증자들의 마음이 컸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역대 기증자들이 기증을 결심한 이유 등을 이야기한 영상은 국립중앙박물관의 홈페이지(현재 '소장품-수어동영상' 제공, 이후 카테고리 수정 가능)에서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 해당 전시에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기증품 문화유산을 하나하나 재현한 '손으로 보는 기증 문화유산' 공간도 전시 뒤편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 김문영 기자 kim.moonyoung@mbn.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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